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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1년 원주 치악성에서 원충갑, 원나라 반란군 합단적 격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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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5-16 07:35 조회1,6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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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譯 高麗史 第九冊 (1991, 사회과학원 고전연구실 편찬, 신서원 발행)



원충갑 (元沖甲)

원충갑은 원주(原州) 사람인데 체구가 짧달막하되 정력이 넘쳐 날래었으며 운동자가 번개처럼 빛났고 위험한 지경에 있으면서도 자기 일신을 돌보지 않았다.



그는 향공진사(鄕貢進士, 지방 추천에 의하여 시험에 합격한 진사)로서 본주(즉 원주)의 별초(別抄)에 소속되어 있었다. 충렬왕 때에 합단(哈丹)의 침략군이 철령을 넘어 함부로 침입하게 되었는데 여러 고을들에서는 그들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 모두 궤주하였으므로 아무도 항쟁하는 자가 없었다.



적들은 원주에 와서 주둔하였는데 적들 중 50여 명의 기병이 치악성(雉岳城) 아래에 와서 로략질을 하였다. 원충갑이 보병 6명을 인솔하고 가서 그들을 구축하고 적의 말 여덟 필을 빼앗아서 돌아 왔다.

적들은 도라도, 독어내, 패란 등의 인솔 하에 군사 400명으로 다시 성 밑에 와서 록전미(祿轉米, 관리들의 록으로 줄 쌀)를 가져 가려고 하였다. 원충갑이 결사대 중산(仲山)등 7명과 함께 적의 행동을 엿보고 있었는데 중산이 먼저 적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한 놈을 베고 형문(荊門) 밖까지 추격해 가니 적들이 안장 얹은 말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 가 크게 기뻐하여 붙잡아 왔던 말 25필을 모조리 그들에게 주었다.



적이 다시 와서 기치를 많이 펴 들고 성을 몇 겹이나 돌려싼 후 사절 한 명을 보내어 글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라고 권고하였다. 원충갑이 돌진해 나가서 사신을 쳐 죽이고 그 돌을 머리에다 매여 던지니 적들이 퇴각하여 공성 도구를 많이 만들므로 성 안에서는 공포에 떨게 하였다.



적들이 또 포로되었던 녀자 2명을 내세워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원충갑은 또 그들을 베어 버렸다. 적들을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진공해 와서 모든 술책을 다하여 성을 공격하니 화살이 빗발치듯 하였고 성이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때에 흥원창(興元倉) 판관 조신(曹愼)이 성 밖에 나가서 적들과 싸웠으며 원충갑은 급히 동쪽 봉우리에 달려 올라가 한 놈의 목을 베었다. 그리하여 적들이 약간 문란해지자 별장 강백송(康伯松) 등 30여 명이 그를 협조하여 나섰으며 원주 아전(州吏) 원현(元玄) 안수정(安守貞) 등 100여 명이 서쪽 봉우리로 내려 가서 협공하게 되었다.



조신이 북을 칠 때에 화살이 그의 바른 팔꿈치를 꿰뚫었으나 북소리는 낮아지지 않았다. 적군의 선봉이 약간 뒤로 물려서자 뒤에 선 자들은 저희끼리 짓밟으면서 퇴각하게 되었다. 주병(州兵)이 힘을 합쳐 공격하니 그 소리는 산을 울리었으며 전후 10회의 전투에서 적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도라도 등 68명을 베어 죽였으며 쏘아 죽인 적군의 수는 거의 절반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적들은 예봉을 꺽이우고 감히 공격도 노략질도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여러 고을들에서도 굳게 방어하게 되어 비로서 적들을 경시하는 마음이 생겼으니 이것은 모두 원충갑에게서 얻은 힘인 것이었다.



원충갑은 공로로 인하여 여섯 번 전임하여 삼사우윤(右尹)으로 되었다. 당시에 오기(吳祁)는 간사하게 참소질을 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생략---









▶▶▶충렬공 2자 김흔 장군은 충남 연기에서 합단적 섬멸



⊙ 합단의침입 (哈丹-侵入)

1290년(충렬왕 16) 원나라의 합단(哈丹)이 고려를 침입한 사건. 원나라의 반군(叛軍) 내안(乃顔)의 부장이었던 그는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나라 장수 내만대(乃蠻帶)에게 패하자 방향을 바꾸어 고려의 동북변을 침입하였다.

고려는 중군만호(中軍萬戶) 정수기(鄭守琪), 좌군만호 박지량(朴之亮), 우군만호 ★김흔(金H)으로 하여금 각각 금기산동(禁忌山洞)·이천현계(伊川縣界)·권가현계(拳縣界)를 지키도록 하는 한편, 원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합단의 무리는 원나라의 쌍성(雙城)을 점령하고 고려의 등주(登州:안변)를 함락하였으며, 이듬해 철령(鐵嶺)을 넘어 교주도(交州道)의 양근(楊根)을 점령하였다.

이에 왕은 강화로 파란하는 한편으로 원주별초(原州別抄) 소속의 원충갑(元沖甲)이 원주에 들어온 적을 물리쳤다. 원나라도 1만의 군사를 보내 고려를 도왔다. 원주에서 패한 합단의 무리들은 계속 남하하여, 주력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들은 다시 연기에 집결하였다가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의 급습으로 대패하였다.

그들의 기병부대는 다시 전렬을 정비하였으나 한희유(韓希愈)의 추격으로 합단과 아들 노적(老的)은 2,000여 기를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이로써 1년 6개월 동안의 합단의 침입은 끝나고 9월 왕은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고려사》 제56권 - 지 제10 > 지리 1 >

청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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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현(燕岐縣)은 원래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연산군의 관할 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현종 9년에 본 목에 소속시켰고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으며 후에 목천(木川) 감무로 하여금 겸임케 하였다. 이 현에 원수산(元帥山)〔충렬왕 때에 한희유(韓希愈), ★김흔 등이 현 남쪽 정좌산(正左山) 아래에서 합단 침략군을 크게 격파 하였는데 세간에 전하기를 부대가 주둔해 있던 곳이라고 하여 원수산이라 하였다고 한다〕이 있고 웅진(熊津)〔즉 신라 때의 서쪽 개천인 웅천하(熊川河)인바 중사(中祀)에 기록되어 있다.〕이 있다.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고전국역총서 > 신증동국여지승람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도 忠淸道 [5]

연기현 燕?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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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산(元帥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 고려 충렬왕(忠烈王) 17년에 합단(哈丹)이 침범해 왔다. 왕이 구원병을 원(元) 나라에 청하니, 세조(世祖)가 평장사(平章事) 설도간(薛?干)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돕게 하고,

왕이 한희유(韓希愈)ㆍ★김흔(金?) 등으로 하여금 3군(軍)을 거느리고 원 나라 군사와 함께 합단의 군병과 더불어 본현 북쪽 청주 경계에 위치한 정좌상(正左山)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공주 웅진까지 추격하니, 땅에 깔린 시체가 30여 리까지 연하였으며, 벤 머리와 노획한 병기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래서 세속에서 지금까지도 그 군사가 주둔하였던 곳을 원수산이라 부른다









▣ 김윤식 - 귀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원충갑과 김흔장군이 함께 대첩한 합단과의 전투이야기 감사합니다.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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