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난(1728년)과 우리가문 (1) --- 이인좌 난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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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5-19 00:00 조회1,529회 댓글0건본문
이인좌 난의 배경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4년) 3월에 일어났다. 이 난으로 영남은 반역향으로 낙인찍히고 이 지역인들의 출사가 좌절되었다.
이인좌 난의 원인은 1717년의 정유독대에서부터 비롯된다. 조선의 19대 왕인 숙종은 희빈 장씨의 아들 세자 균(경종)이 병약한 점을 이유로 왕위가 불안해질 것을 염려하여 노론 당수 이익명과 독대하여 연잉군(영조)으로 하여금 경종의 대를 이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숙종이 죽고 나서 노론측은 그의 명을 받들어 연잉군을 세자에 책봉한다. 그리고 경종이 죽자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영조였다.
조선의 20대 임금 경종과 21대 영조때에는 서인에서 분당한 노론과 소론의 정쟁이 치열하였다. 특히 경종 때는 경종을 지지한 소론과 연잉군(영조)을 지지한 노론의 다툼이 격렬해 왕세자인 연잉군에게 정권을 넘기려던 노론 사대신이 사형당하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어쨌든 경종이 갑작스레 죽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소론은 정치적 기반을 위협받게 되었다. 때문에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등의 과격 소론 세력은 숙종대의 갑술환국(인현왕후 민씨의 복위문제로 남인이 축출당하고 서인이 집권한 사건)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 세력을 포섭하여 영조와 노론측 대신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독살의혹이 있다는 것과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명분으로 영조를 폐하고 소현세자(인조의 맏아들)의 증손인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여 모반을 도모한다.
그러나 이 모반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영조가 탕평책으로 소론에 대해 정치적 보복을 하려는 노론측 인사를 파면시킨 사건)으로 소론 정권이 들어서면서 약화되었다. 동조자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최규서에 의해 모반계획이 고변되기에 이르렀다. 또 김중만 등은 역모 세력들의 취군 동태를 파악해 고발하기도 했다. 모반계획이 발설되었음을 안 반역세력은 먼저 선수를 쳤다. 이인좌는 반역의 중심인물이었다.
▣ 김윤식 - 대부님 연재 기대가 큽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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