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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난(1728년)과 우리가문 (4) --- 정조와 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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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5-21 17:20 조회1,3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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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개선과 좌절



영조 이후 반노론적 입장에 섰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조선 22대 왕)는 같은 반노론적 입장인 영남지역을 끌어안아 우군세력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정조 12년(1788) 영남 유생 이진동 등이 이인좌 난 당시 이에 맞서 싸운 사대부의 명단을 기록한 <무신창의록>을 갖고 상경하자 정조는 이들을 특별히 알현한 후 “영남인이 이인좌 난에 가담한 것은 일부 흉도들만의 소행인데 이로 인해 영남 한 도를 어찌 다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해 영남인에 대한 대우를 언급하였다.



이처럼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에 대항하기 위헤 영남과 전략적으로 제휴하려 하였고, 재위 16년 동안 영남인에 대한 차별은 상당 부분 완화되었다.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에서 특별 과거인 별시(別試)를 베풀어 관료를 직접 채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론의 뿌리는 워낙 깊어 국왕 정조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데 노론 숙청을 결심하던 그가 24년을 재위한후 의문사 한 다음에는 다시 등용이 제한되었다.



결국 조선후기의 영남차별은 지역간의 문화나 지역인들의 관습 등이 아닌 정치적 사건의 부정적 측면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솔내 -

▣ 상석 - 당리,당략,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여 조선은 서서히 몰락 해 갔으니,위에서 아래로 부터 전반적인 사고의 틀을 확 깨 부수지 않는 한 선진미래는 약속 할 수 없지요!.

▣ 김항용 - 잘 공부했습니다.

▣ 김윤만 -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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