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凡기념실 京橋莊에 만든다
페이지 정보
김영윤 작성일04-05-22 05:48 조회1,434회 댓글0건본문
만시지탄이나 반가운 소식입니다 2002.11.24 주회씨 발용씨와 답사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오늘(5월21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퍼왔습니다
白凡기념실 京橋莊에 만든다 |
![]() ![]() |
백범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이 광복 뒤 환국해 흉탄에 서거하기까지 3년7개월 동안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했던 서울 종로구 평동 경교장(京橋莊·서울시 유형문화재 129호)에 백범선생 기념실이 생긴다. 현재 경교장 외관은 변형시키지 않고 내부를 개조해 약국과 원무실 등으로 사용 중인 강북삼성병원의 한 관계자는 20일 “늦어도 오는 11월까지 백범김구기념실을 세우기로 했다”며 “전시실 규모는 아직 확정하지 않았으며, 전시 유물은 백범기념사업회나 백범기념관 등과 협의해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병원측은 백범이 서거했던 2층에 20여평 규모로 기념실을 마련하는 것을 서울시와 협의 중이지만, 서울시측은 기념실 규모를 더 넓힐 것을 요청한 상태다. 일제 강점기 이름난 건축가였던 김세연(金世演)의 설계로 1939년 고전주의풍으로 완공한 경교장은 지상 2층, 지하 1층 연건평 264평 규모로, 좌우대칭형 2층 양옥으로 지었다. 정면 중앙 1층에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승·하차 시설을 갖춘 현관을 설치했으며, 당구실과 이발실도 둔 초호화건물이었다. 일제 강점기 손꼽히는 거부였던 금광업자 최창학(崔昌學) 소유였지만, 백범이 1945년 11월 23일 환국하자 최창학은 백범에게 숙소로 제공했다. 백범은 경교장에서 환국 첫 밤을 지낸 뒤 “내가 혼이 왔는지 유체(遺體)가 왔는지 분간할 수 없는 심정”이라며 감회를 표현했다. 경교장은 그뒤 광복 직후 혼란기 한국 현대사의 구심점이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가 열렸으며, 신탁통치반대운동이나 남북협상의 산실이었다. ‘백범일지’도 이곳에서 집필됐다. 백범이 서거한 뒤 경교장은 대만대사관저, 9·28 서울수복 직후 미군특수부대 주둔지, 월남대사관저 등으로 사용됐다. 1966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해 경교장 뒷벽에 10층 건물을 바로 붙여서 신축한 뒤 병원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백범이 서거했던 2층 집무실은 현재 의사 휴게실로 이용되고 있다 |
.
▣ 김주회 - 참으로 다행스럽고 반가운 소식입니다. 영윤 대부님, 발용 형님과 셋이서 경교장을 찾아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하고도 반년이나 지났네요. 세월은 流水와 같다더니.....
▣ 김주회 - 김세연(金世演)??? 1920,30년대 한창 활동하시던 花山君(휘 金澍) 후손들 文演, 胄演.....
▣ 김항용 - 반가운 소식입니다.
▣ 김윤만 - 정부나 서울시에서 소유권을 인수하지 아니한 점이 아쉽습니다. 욕심이 지나친 걸까요.
▣ 김윤식 - 귀한 소식 감사합니다.
▣ 솔내 - 늦었지만. 반가운 소식이군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