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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寓庵集(우암집) 국역화 29--- 두모포, 봉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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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6-05 21:03 조회1,6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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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두모포

성동구 옥수동 한강변은 한강 본류와 중랑천의 두 물줄기가 만나기 때문에 일찍이 두뭇개·두모포(豆毛浦)라 불리었다. 그리고 그 넓은 강물을 이룬 경치는 저자도(楮子島)와 더불어 동호(東湖)라 하여, 안쪽으로 물결이 잔잔하며 주위 산록의 풍경이 조용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였다. 따라서 동호 북안에는 몽뢰정(夢賚亭)·유하정(流霞亭)·황화정(皇華亭)·보락당(保樂堂)·쌍호정(雙虎亭) 등 많은 누정이 있어 귀인들이 수시로 찾아 풍류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였다.



특히 이곳에는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 있어 더욱 경승을 자랑하였다. 세종은 1426년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에게 휴가를 주어 진관사·장의사 등 절에 가서 독서에 전념하도록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실시하였는데, 여기서 독서당이 기원하였다. 성종 23년(1495) 용산 한강변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하였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여파로 폐지되었다. 다시 중종 12년(1517)에 응봉 남쪽 기슭 옥수동 244번지 일대에 있던 두모포 정자를 고쳐 독서당을 설치하고 동호독서당이라 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탈 때까지 동호독서당은 75년 동안 학문 연구와 도서 열람의 도서관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 기능은 정조 때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독서당이 폐지된 후에는 부군당이 세워져 얼마 전까지 있었으나, 현재는 주택이 들어서 있다. 응봉 아래 정남향 언덕 위인 월송암(月松庵) 서쪽이 독서당 위치이다.







1) 봉은사

봉은사(奉恩寺)는 강남구 삼성동 73번지 수도산(修道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에 속한 서울의 대표적 사찰이다.





이 사찰의 창건 시기는 그동안 1932년에 권상로(權相老)가 지은 <봉은사사적비명(奉恩寺史蹟碑銘)>에 의해 통일신라 원성왕 10년(794)에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실려있는 봉은사와 현재의 봉은사를 동일한 사찰로 잘못 인식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봉은사는 경주 지역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어, 현재의 봉은사와는 전혀 무관하다.

봉은사의 원래 명칭은 견성사(見性寺)였다. 따라서 이 사찰의 연혁은 견성사로부터 확인해야 하나, 현재로서는 자료의 부족 등으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최근에 새롭게 발견된 《봉은사본말사지(奉恩寺本末寺誌)》 등의 자료를 참조하여 볼 때 고려시대에 봉은사의 전신(前身)인 견성사가 창건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견성사는 본래는 현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1km 쯤 떨어진 선릉(宣陵)의 동쪽에 있었다. 연산군 4년(1498)에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선릉의 원찰(願刹)로 견성사를 중창(重創)하고 봉은사라 사찰명을 바꾸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절의 실질적인 역사가 전개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봉은사가 명실상부하게 조선 최대의 명찰(名刹)이 된 것은 명종 3년(1548)에 보우대사(普雨大師)가 주지로 부임한 이래, 당시 섭정(攝政)을 맡고 있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적극적인 옹호를 배경으로 하면서부터이다. 즉 명종 6년에는 보우대사가 판사(判事)가 되어 부활된 선종(禪宗)의 승과(僧科)를 보게 하면서 봉은사를 선종수사(禪宗首寺)로 지정하였다. 명종 7년(1552)에는 봉은사 맞은편에 있는 지금의 삼성동 무역센터와 한국종합전시관 자리에서 선종 승과고시가 대규모로 치루어져 이 뒤부터 이 곳을 ‘중의 벌’ 또 는 ‘승과평(僧科坪)’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어 명종 17년(1562)에 보우대사가 지금의 위치인 수도산으로 절을 옮겨 세웠다. 보우대사 이후 봉은사에서는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과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 등 덕 높은 승려들을 많이 배출하기도 했다.

그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대전란 때 불타버린 것을 인조 15년(1637)에 중건하였고, 영조 33년(1757)에는 조정의 하사금을 받아 절을 중수하였다. 정조 14년(1790)에는 전국 사찰의 승풍(僧風)과 규율을 감독하는 5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경기도와 강원도의 사찰 일부를 관할하게 되었고, 순조 24년(1824)에 다시 한번 중수하였다. 철종 6년(1855)에는 화엄경을 판각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경판(經板)을 완성하였고 판전(板殿)을 지어 안치하였다.

1911년에 제정 공포된 <사찰령(寺刹令)>에 의한 30본사(本寺) 중 갑찰(甲刹) 대본사(大本寺)가 되어 서울과 경기 일원의 80여 사찰을 관장하게 되었다.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는 한강이 범람하여 인근 주민 1천여명이 강물에 빠지자, 나청호화상(羅晴湖和尙)이 중심이 되어 708명을 구제하였는데, 이를 기리는 시와 글·그림을 모아 《불괴비첩(不壞碑帖)》을 편찬하기도 하였고, 1929년에 도움을 받은 주민들이 절 앞에 수해구제공적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1939년에 불탄 것을 1941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광복 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의 직할사찰이 되었다. 1972년에는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의 역장(譯場)이 설치되어, 이곳에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한글화하는 역경사(譯經士)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3칸의 건물이었던 것을 1982년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중창하였는데, 팔작지붕이며 그 현판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필체이다. 이 대웅전 안에는 범종(梵鍾) 2구가 놓여 있는데, 조선시대 범종을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이다.



판전(板殿)은 봉은사가 소장하고 있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4호 《화엄경소(華嚴經疏)》를 비롯한 총 15종 1,480매의 많은 경전(經典) 목판본(木板本)을 보관하기 위하여 세워진 전각이다. 이 판전은 철종 6년(1855)에 건립되어 현재 봉은사에 남아 있는 전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익공식(翼工式) 맞배지붕으로 세워졌다. 정면 처마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71세 때 병중에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판전 아래쪽에 있는 비각(碑閣)은 고종 7년(1870)에 세워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보호하고 있는 건물이고, 이 비각의 오른쪽에는 1986년에 세운 추사김정희선생기적비(秋史金正喜先生紀績碑)가 자리하고 있다.

선불당(選佛堂)은 대웅전 한단 아래 왼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중을 위한 일종의 선방(禪房)으로 독특한 구조를 가진 건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단층 목조 기와집으로 초익공(初翼工) 양식을 이루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나 전·후·좌·우 네 곳에 작은 합각(合閣)을 형성하였다. 이 전각은 비록 연대가 오래지 않고 다소 변형되었으나 서울 시내에 이만한 크기의 거창한 선불당은 그 유례가 없으며, 19세기의 귀중한 목조건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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