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寓庵集(우암집) 국역화 36---북경 사행길 3 (다시 요양에서 발해만을 타고 북경 앞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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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6-06 18:54 조회1,6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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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을 향해





1. 북진묘 보천석 (요양-북진묘)



▲중국의 북쪽 변방을 지켜주는 신당 북진묘(北鎭廟).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의무려산의 산신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워졌다. 묘정에 역대 황제들과 고관 대작들이 자신의 영화를 빌기 위해 세운 비석들로 가득하다.

▲북진묘 북쪽 구석에 있는 보천석. 건륭제를 비롯한 명사들의 詩板을 박았던 네모꼴의 흔적들이 완연하다. 보천석 하단 세모꼴로 나 있는 홈을 엎어져 통과하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사신길 따라갔던 하인들이 반드시 들렀다고 한다.





2. 만주 군벌 이성량 패루 (발해만 연안 : 북진묘-광녕성-이성량 패루-금주)



▲조선인 출신의 명나라 장수 이성량의 공적을 기리는 패루.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 사령관으로 조선에 와 나라를 구했던 이여송의 아버지로, 22년간 중국 동북부에서 군벌로 군림하였다.





3. 영원성의 혈투 (사동비-금주-송산-행산-탑산-영원성-산해관)



▲조선 사신 일행들이 반드시 들러서 비문을 拓本해 갔다는 사동비의 현장. 비석은 사라진 지 오래고 제각만이 폐허가 된 채 남아 있다.

▲청나라 풍의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영원성 거리. 명나라 말, 명 왕조가 그 훈공으로 인해 패루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청나라에 항복한 조대수 부자의 패루가 보인다.

▲명나라 말, 청나라와 결전을 벌였던 산해관 밖 四城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영원성. 청 태종은 행여 조선에서 명나라를 도울까 봐 볼모로 잡혀 있던 효종을 이곳까지 끌고 다녔으며, 효종은 이 다락 위에서 패주하는 명군의 참상을 바라 보았다. 당시 썼던 대포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4. 오호도 국화녀상 (금주-고교보-금서-흥성-국화녀상-오호도)



▲齊나라 충신 5백 명이 들어가 집단 자결했다 하여, 우리 사신들이 멀리서 배례하고 지나갔다던 절개의 섬 오호도. 우리나라의 백령도에서도 날씨가 좋으면 가물가물 보인다는 섬이요, 병자호란 후 청국으로부터 강요된 조선 원병선단(援兵船團)이 풍파에 침몰했다던 바로 그 섬이다.

▲오호도가 멀리 바라보이는 흥성 해안. 연행길에 우리 사신들이 성지처럼 들렀다는 곳으로 백성을 괴롭히는 악룡을 퇴치, 나라를 구했다는 중국의 잔 다르크 국화녀의 조각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5. 강녀묘 망부석 (흥성-동관-중후소-강녀묘-산해관(-만리장성 시작)-진황도)



▲명나라 때 변방 사령부가 있었던 중후소 시장의 노점. 우리나라 털모자의 거의는 사행길 따라 온 의주 상인들에 의해 이곳으로부터 공급됐었다. 연암은 이곳을 지나면서 모자 때문에 유출되는 외화를 걱정하고 있다.

▲만리장성이 멀리 바라보이는 둔덕에 자리한 강녀의 망부석. 건너편 암벽에 새겨진 글은 건륭제의 친필 御製詩요. 望夫石 글씨 아래 보이는 것이 강녀가 서 있던 발자국이다.

▲강녀묘 안의 강녀상. 문화혁명 때도 강녀묘를 파괴하지 않은 것은 인민을 혹사한 데 대한 民怨의 구심 인물이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강녀묘의 현판. 연암이 왔을 때와는 달리 萬古流芳이라 씌어져 있다.





6. 산해관 전적지 (강녀묘, 장대, 만리장성, 천하제일관, 진황도시, 유관)



▲산해관에서 시작하여 甘肅省 가욕관에 이르는 만리장성. 춘추전국 시대에 변경을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을 秦의 시황제가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증축하였다.

▲산해관의 관문인 천하제일관. 글씨 하나가 다락 문짝 두 개 크기라는 이 명필은 진나라 재상 이사(李斯)의 글씨로 구전돼 내렸지만, 연암은 이 현장에서 그 서체가 해자(楷字)임을 보고 진나라 때에 해자가 없었음을 들어 이사의 글씨가 아니라고 고증했다. 이 산해관 문에 들면 연행길의 4분의 3을 온 것으로 간주했었다.

▲천하제일관은 중국의 관광 명소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천하제일관 앞에서 칼이나 붓 등 기념품을 사는 관광객들의 모습





7. 조선현을 찾아 (산해관-진황도시, 진황구선 입해처, 노룡(조선현), 수양산)



▲산해관 밖 노룡현 古城의 성문. 바로 노룡현의 옛 지명이 조선현이었고 그 성벽이 조선성이었다. 심양 인근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옛 성과 그 축조 방식이 유사하다.

▲수양산 강 기슭의 이제묘 인근. 지금 이곳에 이제묘는 흔적도 없고, 감자 전분 국수의 주산지로 소문이 나 있을 뿐이다.





8. 조선인 집단촌 고려보 (노룡 조선현-풍윤-고려보-옥전)



▲병자호란 때 납치되어 온 조선인들의 집단 마을인 고려보. 김창업의 연행록에 보면 조선 사람들이 벼농사를 짓는 것을 보았다 했는데, 지금은 高麗野라는 들판 이름으로만 남아 있고 그 논자리에서는 고구마 농사를 짓고 있다.

▲고국의 사신 행차가 있으면 손수 고향 음식으로 대접하며, 울면서 고향 소식을 물었다던 고려보의 지명 표시











▣ 김윤식 - 연재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덕분에 많은 공부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윤만 - 잘 읽고 있습니다.

▣ 솔내 -

▣ 김용주 - 감사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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