寓庵集(우암집) 국역화 40--- 有明朝鮮國金君公亮墓碣銘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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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6-09 18:06 조회1,461회 댓글0건본문
우암집 국역 추진과 병행하여 화산군(휘澍)의 부 안원군(휘公亮)의 묘갈명을 번역하였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호음 정사룡의 호음집에 실려 있는 안원군 묘갈명을 찾아서
이번 기회에 번역을 한 것입니다. 오탈자등 약간의 미흡함은 수정 보완해 나갈 것입니다.
○안원군 묘갈명
-몰후 2년, 1546년 호음 정사룡 찬, 동고 김로 서
-호음집에 有明朝鮮國金君公亮墓碣銘 수록
○묘갈 탁본
-2003년 10월, 여주문화원
○묘갈명 번역 (2004년 6월 4일)
-번역 : 우진(祐振, 안원군 16세손, 1915生)
-윤문 : 주회(柱會, 안렴사공 21세손)
-추진 : 용주(容周, 안원군 세손)
■ 有明朝鮮國金君公亮墓碣銘
원래 김씨가 신라 경순왕(新羅 敬順王)부터 이어져 전해 왔으니 여러 김씨 중에서 안동김씨(安東金氏)가 가장 문벌(門閥)이 좋으니라.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한림주서를 거쳐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를 지내신 諱환(丸)은 군의 증조부이시며 조부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참의(戶曹參議)의 증직을 받으신 諱종손(宗孫)이시고 부는 군수(郡守)를 지내시고 명나라 홍치황제등극진하사종사관(弘治皇帝登極進賀使從事官)으로 중국에 다녀 오시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贈職)을 받으신 諱는 성(城)이시니 이하(以下)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군수공께서 영의정(領議政)을 증직(贈職)받은 허손(許蓀)의 따님을 취(娶)하여 성화 임진년(成火 壬辰年)에 군을 낳으시니 군의 諱는 공량(公亮)이요 字는 필지(弼之)라.
군이 나신지 열흘도 못 되어 모부인이 돌아 가심으로 증조모 밑에서 자라시니 자랄수록 말수가 적으시며 장난과 희롱을 않으시고 스스로 글 읽기를 좋아하여 종실 주계군(宗室 朱溪君)에게 수업하시니라.
그때에 군의 외삼촌인 충청공 허종(忠貞公 許琮)의 덕망이 한 세상을 덮었는데 일찍이 군에게 벼슬길에 나가기를 권고하였으나 군께서는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하심으로 허충정공(許忠貞公)이 춘추전(春秋傳)을 읽어 보도록 시험한 결과 군께서 이에 응하시어 춘추전을 외우는데 물이 흘러 가는 것처럼 거침없이 외우심으로 크게 칭찬과 탄식을 받았으며
또한 군께서는 여러번 지방에서 천거(薦擧)를 받으시어 더욱 공부에 힘써서 장차 과거(科擧)에 나가고자 큰 포부를 가졌으나 마침 연산군(燕山君) 때에 정치가 어지러워서 조정대관(朝廷大官)을 함부로 죽임으로 군께서는 드디어 세상과 인연을 끊으시고 두문불출하여 원임고관(原任高官)들과 친교를 맺으시고 백의종군(白衣從軍) 하듯 처세하였으나 항상 편안한 모습으로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며
다만 글과 술로 스스로 즐기시니 자질배(子姪背)와 제자(弟子)들이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재주에 따라 가르치는데 종일토록 강의(講義)를 쉬지 않으시고 춥고 더움으로 인해 강의를 퍠지(廢止)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군께서는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시어 내상(內喪)을 당하실 때에 모든 일을 분수와 예절(禮節)에 맞도록 처리하시고 계모(繼母)를 섬기실 적에는 항상 얼굴 빛을 환하게 하여 효도를 다 하시며 또한 두 아우를 가르칠 적에는 우애로운 마음으로 정성껏 지도하시고 매양 생신 날에는 세속 사람들과 같이 즐거워하지 않으시고 부모를 사모하는 슬픔에 잠기셨노라. 천성이 순진하심으로 겉모양을 닦지 않으시고 손님을 접대할 때에는 당초의 마음을 변치 아니 하시니라.
가정 갑진 오월 이십칠일 (嘉靖甲辰五月二十七日)에 숙환으로 집에서 별세(別世)하시니 춘추가 七十三세에 하세(下世)하시다.
군의 배위(配位) 이씨는 광양현 팽수(光陽縣 彭穗)의 따님이시니 집을 다스리는데 있어 제수(祭需)를 항상 정갈하게 차리시고 손님을 접대할 적에는 술과 안주를 넉넉하게 마련하시어 군께서 곤란한 처지를 당하지 않도록 하심은 모두 내조(內助)에서 이루어짐이라.
또한 숙환에 의하여 별세(別世) 하시니 수는 七十을 사시니라. 군의 장지(葬地)를 먼저 여주 사동(麗州 蛇洞)에 정하였으므로 이에 합장하니라.
三남一녀를 두시니 장남은 완(浣)이요 차남은 척(滌)이니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三남은 주(澍)이니 기해년 문과(己亥年 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여 지금 훙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로 있는데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나서 한 세상을 울리고 女는 별제(別?) 이직(李직)에게 출가하니라.
완(浣)은 첨사 강석경(僉使 姜碩卿)의 딸에게 장가 들어 二남幾녀를 낳으니 남에는 충남(忠男) 효남(孝男)인데 모두 어리고 녀는 장중제(張仲悌)에 출가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니라. 척(滌)은 박양근(朴養根)의 딸에게 장가 들어 一남을 낳으니 이름이 인남(仁男)이요, 주(澍)는 종실 진양수 영(宗室 鎭陽守 渶)의 딸에게 장가들어 二남一녀를 낳으니 이름이 순남(順男) 정남(正男)이요 모두 어리니라
이에 명(銘)하여 가로되
높고 화려한 가문에서 출생하여
좋은 공부와 훌륭한 학덕을 전해 받아
학문이 성취되고 행실이 도타와서
벼슬과 녹봉을 헌신짝과 같이 버리시고
스스로 몸을 낮추어 그 종적을 감추고 숨어 사시니
평소에 쌓은 덕에 의하여
신발이 문 앞에 가득하도다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취하는 바를 반대로 버리니
비록 편안하게 세상을 마쳤으나
마침내 배운 바 학문과 재주를 다 쓰지 못하고
숨은 덕이 빛났으니
높은 명망과 좋은 칭송을 받은 것이 부끄럽지 않도다.
지금은 운수가 막힌 것 같지만
후세에 운수가 대통하리라
▣ 김용주 - 안원군 할아버님의 묘비문 잘보았읍니다.감사합니다
▣ 김항용 - 번역을 하신 우진대부님, 윤문을 하신 주회대부님 큰 일을 하셨습니다. 안렴사공파 홈에 우선 올리겠습니다.
▣ 솔내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귀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 김윤식 -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호음 정사룡의 호음집에 실려 있는 안원군 묘갈명을 찾아서
이번 기회에 번역을 한 것입니다. 오탈자등 약간의 미흡함은 수정 보완해 나갈 것입니다.
○안원군 묘갈명
-몰후 2년, 1546년 호음 정사룡 찬, 동고 김로 서
-호음집에 有明朝鮮國金君公亮墓碣銘 수록
○묘갈 탁본
-2003년 10월, 여주문화원
○묘갈명 번역 (2004년 6월 4일)
-번역 : 우진(祐振, 안원군 16세손, 1915生)
-윤문 : 주회(柱會, 안렴사공 21세손)
-추진 : 용주(容周, 안원군 세손)
■ 有明朝鮮國金君公亮墓碣銘
원래 김씨가 신라 경순왕(新羅 敬順王)부터 이어져 전해 왔으니 여러 김씨 중에서 안동김씨(安東金氏)가 가장 문벌(門閥)이 좋으니라.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한림주서를 거쳐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를 지내신 諱환(丸)은 군의 증조부이시며 조부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참의(戶曹參議)의 증직을 받으신 諱종손(宗孫)이시고 부는 군수(郡守)를 지내시고 명나라 홍치황제등극진하사종사관(弘治皇帝登極進賀使從事官)으로 중국에 다녀 오시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贈職)을 받으신 諱는 성(城)이시니 이하(以下)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군수공께서 영의정(領議政)을 증직(贈職)받은 허손(許蓀)의 따님을 취(娶)하여 성화 임진년(成火 壬辰年)에 군을 낳으시니 군의 諱는 공량(公亮)이요 字는 필지(弼之)라.
군이 나신지 열흘도 못 되어 모부인이 돌아 가심으로 증조모 밑에서 자라시니 자랄수록 말수가 적으시며 장난과 희롱을 않으시고 스스로 글 읽기를 좋아하여 종실 주계군(宗室 朱溪君)에게 수업하시니라.
그때에 군의 외삼촌인 충청공 허종(忠貞公 許琮)의 덕망이 한 세상을 덮었는데 일찍이 군에게 벼슬길에 나가기를 권고하였으나 군께서는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하심으로 허충정공(許忠貞公)이 춘추전(春秋傳)을 읽어 보도록 시험한 결과 군께서 이에 응하시어 춘추전을 외우는데 물이 흘러 가는 것처럼 거침없이 외우심으로 크게 칭찬과 탄식을 받았으며
또한 군께서는 여러번 지방에서 천거(薦擧)를 받으시어 더욱 공부에 힘써서 장차 과거(科擧)에 나가고자 큰 포부를 가졌으나 마침 연산군(燕山君) 때에 정치가 어지러워서 조정대관(朝廷大官)을 함부로 죽임으로 군께서는 드디어 세상과 인연을 끊으시고 두문불출하여 원임고관(原任高官)들과 친교를 맺으시고 백의종군(白衣從軍) 하듯 처세하였으나 항상 편안한 모습으로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며
다만 글과 술로 스스로 즐기시니 자질배(子姪背)와 제자(弟子)들이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재주에 따라 가르치는데 종일토록 강의(講義)를 쉬지 않으시고 춥고 더움으로 인해 강의를 퍠지(廢止)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군께서는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시어 내상(內喪)을 당하실 때에 모든 일을 분수와 예절(禮節)에 맞도록 처리하시고 계모(繼母)를 섬기실 적에는 항상 얼굴 빛을 환하게 하여 효도를 다 하시며 또한 두 아우를 가르칠 적에는 우애로운 마음으로 정성껏 지도하시고 매양 생신 날에는 세속 사람들과 같이 즐거워하지 않으시고 부모를 사모하는 슬픔에 잠기셨노라. 천성이 순진하심으로 겉모양을 닦지 않으시고 손님을 접대할 때에는 당초의 마음을 변치 아니 하시니라.
가정 갑진 오월 이십칠일 (嘉靖甲辰五月二十七日)에 숙환으로 집에서 별세(別世)하시니 춘추가 七十三세에 하세(下世)하시다.
군의 배위(配位) 이씨는 광양현 팽수(光陽縣 彭穗)의 따님이시니 집을 다스리는데 있어 제수(祭需)를 항상 정갈하게 차리시고 손님을 접대할 적에는 술과 안주를 넉넉하게 마련하시어 군께서 곤란한 처지를 당하지 않도록 하심은 모두 내조(內助)에서 이루어짐이라.
또한 숙환에 의하여 별세(別世) 하시니 수는 七十을 사시니라. 군의 장지(葬地)를 먼저 여주 사동(麗州 蛇洞)에 정하였으므로 이에 합장하니라.
三남一녀를 두시니 장남은 완(浣)이요 차남은 척(滌)이니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三남은 주(澍)이니 기해년 문과(己亥年 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여 지금 훙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로 있는데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나서 한 세상을 울리고 女는 별제(別?) 이직(李직)에게 출가하니라.
완(浣)은 첨사 강석경(僉使 姜碩卿)의 딸에게 장가 들어 二남幾녀를 낳으니 남에는 충남(忠男) 효남(孝男)인데 모두 어리고 녀는 장중제(張仲悌)에 출가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니라. 척(滌)은 박양근(朴養根)의 딸에게 장가 들어 一남을 낳으니 이름이 인남(仁男)이요, 주(澍)는 종실 진양수 영(宗室 鎭陽守 渶)의 딸에게 장가들어 二남一녀를 낳으니 이름이 순남(順男) 정남(正男)이요 모두 어리니라
이에 명(銘)하여 가로되
높고 화려한 가문에서 출생하여
좋은 공부와 훌륭한 학덕을 전해 받아
학문이 성취되고 행실이 도타와서
벼슬과 녹봉을 헌신짝과 같이 버리시고
스스로 몸을 낮추어 그 종적을 감추고 숨어 사시니
평소에 쌓은 덕에 의하여
신발이 문 앞에 가득하도다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취하는 바를 반대로 버리니
비록 편안하게 세상을 마쳤으나
마침내 배운 바 학문과 재주를 다 쓰지 못하고
숨은 덕이 빛났으니
높은 명망과 좋은 칭송을 받은 것이 부끄럽지 않도다.
지금은 운수가 막힌 것 같지만
후세에 운수가 대통하리라
▣ 김용주 - 안원군 할아버님의 묘비문 잘보았읍니다.감사합니다
▣ 김항용 - 번역을 하신 우진대부님, 윤문을 하신 주회대부님 큰 일을 하셨습니다. 안렴사공파 홈에 우선 올리겠습니다.
▣ 솔내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귀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 김윤식 -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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