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Re:寓庵集(우암집) 국역화 40--- 안원군(휘公亮)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06-09 18:07 조회1,516회 댓글0건

본문





■ 안원군 김공량(金公亮, 1472∼1544)



안렴사공의 7세손으로 호를 양곡(楊谷)이라 하였으며 증직으로 이조판서와 양관 대제학을 받았고 보조공신(補祚功臣)에 올라 안원군(安原君)의 군호를 받았다.

정사룡의 문집 [호음잡고](湖陰雜稿)에 <유명조선국김군공량묘갈명>(有明朝鮮國金君[公亮]墓碣銘)이 실려 있고,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기록이 있다.





<우암집 연보>

1520년(3자 주 8세) 기묘년 주계군 성광 이심원(李深源, 1454∼1504) 공의 문인으로서 장차 사문(師門)에 앙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전시(殿試)를 보지 않았다. 내구(內舅)인 충정공 허종(許琮) 상공께서 벼슬에 나아가도록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남곤과 심정 등이 권력을 휘둘러 여러 현인들을 무고하여 죽였다. 매서이신 문강공 박세희(朴世熹)도 역시 화를 입었다. 이에 마침내 세간사에 뜻을 끊어버리고 문을 닫아걸고 궤안(机案)을 청소하고 학문을 하였다. 자제나 조카 및 학자 가운데 배움을 청하여 오는 자들이 있으면, 자질에 따라서 가르침을 베풀어서 종일토록 강독하고 풀이하여 추위나 더위라고 해서 그만두지를 않았다.

1544년 5월 27일 판서공(공량)께서 졸하였다. 세자가 송별하고 부의하는 뜻을 내리셨다. 9월 17일 배위 정부인 이씨가 졸하였다. 세자가 또 부의를 보내었다. 10월 20일에 여주 백양동 선영 안 정좌 벌에 합장하였다.

1546년 8월 15일에 묘도에 비갈을 세웠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570) 판서가 명을 짓고, 동종의 동고(東皐) 김로(金魯, 1498∼1548) 교리가 글씨를 썼다. 12월에 상기를 마쳤다.









안원군 공량, 목사공 공망의 스승

<김공망 묘갈명 - 송인 서, 김이 서병전>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일찍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으나 스스로 힘써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워 정덕(正德) 병인년(丙寅年 1506년 연산군 12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 이심원(李深源)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연(伯淵), 호는 성광(醒狂)·묵재(默齋)·태평진일(太平眞逸). 효령대군 보(補)의 증손으로, 평성군(枰城君) 위(#위16)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천채씨(仁川蔡氏)로 부사 신보(申保)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1478년(성종 9) 주계부정(朱溪副正)에 제수되어 성종의 신임을 받았으나, 임사홍(任士洪)의 무고로 장단·이천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1487년 종친과시강경사(宗親科試講經史)에서 장원급제하여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제수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뒤 조광조(趙光祖)·정광필(鄭光弼)을 비롯한 유림들의 계(啓)에 의하여 1517년(중종 12)에 신원(伸寃)되었으며, 또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이 세워지고, 흥록대부주계군(興祿大夫朱溪君)으로 증직되었다.

충경사(忠景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성광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醒狂遺稿, 眉#수04集, 東儒師友錄. 〈韓如愚〉









안원군 공량의 내구(內舅)=외숙(外叔)



허종(許琮) More Info.

세조(世祖)3년(1457년), 별시(別試) 을과3(乙科3)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34년, 갑인

자(字) 종경(宗卿)

호(號) 상우(尙友)

본관(本貫) 양천(陽川)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충정,적개공신/양천부원군(忠貞,敵愾功臣/陽川府院君)

>>> 가족사항

부(父) 허손(許蓀)

생부(生父)

조부(祖父) 허비(許扉)

증조부(曾祖父) 허기(許?)

외조부(外祖父) 최안선(崔安善)

처부(妻父) 한서봉(韓瑞鳳)

자(子) 허광(許?)

제(弟) 허침(許琛)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456(병자)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관직(官職) 우의정%(右議政%), 한림&(翰林&)



■ 허종(許琮){2}

1434(세종 16)∼1494(성종 2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종경(宗卿)·종지(宗之), 호는 상우당(尙友堂). 군수 손(蓀)의 아들이며, 좌의정 침(琛)의 형이다.

1456년(세조 2)에 생원시를 거쳐, 1457년 별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의영고직장 겸 세자우정자(義盈庫直長兼世子右正字)가 되고, 1458년에 군기시직장 겸 세자우정자가 되었다.

1459년 언로를 개방하고, 이단을 물리치고, 경연을 열 것 등을 상소하여 세조의 신임을 얻으면서 선전관을 겸하였으며, 그해 지평 이영은(李永垠), 승문원부교리 정효상(鄭孝常) 등과 함께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았고, 이어 통례문봉례랑 지제교 세자좌정자(通禮門奉禮郎知製敎世子左正字)가 되었다.

1460년 여진족의 침입 때 평안도병마절제사도사로 출정하였고, 돌아와서 성균관주부·예문관봉교를 거쳐 이듬해에 형조도관좌랑이 되었다.

그뒤 함길도도사·사간원정언·함길도경차관·훈련원판관을 거쳐 1465년에 성균관사예에 오르면서 평안·황해·강원·함길도체찰사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이 되어 북변경영에 공헌하고,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1466년 함길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아버지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가,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계기로 기복(起復)되어 조석문(曺錫文)·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 등과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헌하여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양천군(陽川君)에 봉하여졌다.

1469년(예종 1)에 평안도관찰사·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대사헌에 오르고, 그 이듬해 병조판서가 되었다.

1471년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그뒤 지중추부사·판중추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을 거쳐 147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해 10월 건주위(建州衛)여진족이 침입하자 평안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이에 대비하였고, 이듬해 의정부좌참찬이 되었다가 할머니상으로 사직하였다.

1481년 환조(還朝)하여 북변방어를 위한 〈평안도연변제읍적로요해산천험이도 平安道沿邊諸邑賊路要害山川險易圖〉를 제작하여 올리고 호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임원준(任元濬) 등과함께 《소문충공집 蘇文忠公集》을 주해(註解)하고 우찬성이 되었다.

1483년에는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였고, 세조비 윤씨의 국상 때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가 되었으며, 서거정(徐居正)·노사신(盧思愼)·어세겸(魚世謙)·유순(柳洵)·유윤겸(柳允謙) 등과 함께 《연주시격 聯珠詩格》·《황산곡시집 黃山谷詩集》을 언해하였다.

1485년에 어머니상으로 사직하였고, 1487년에 기복되어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부사 왕창(王敞)의 원접사·반송사로 활약하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1489년 강원도축성사로 파견되어 축성·병기를 고험하고 곧 영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491년 여진족 우디거(兀狄哈)가 함길도방면으로 침입하자,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가 되어 이를 격파하고, 그 이듬해에 우의정에 올랐다. 문무를 겸전하여 국방과 문예에 큰 공을 남겼고, 의학에도 조예가 깊어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겸대하면서 중종 때의 명의인 김순몽(金順蒙)·하종해(河宗海) 등을 교회(敎誨)하였다.

그리고 서거정·노사신 등과 함께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을 언해하였으며, 윤호(尹壕) 등과 《신찬구급간이방 新撰救急簡易方》을 편찬하였다. 성종조의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문집으로는 《상우당집》이 있고, 편서에는 《의방유취 醫方類聚》를 요약한 《의문정요 醫門精要》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韓國醫學史(盧正祐, 韓國文化史大系 6, 1978)

女眞關係(李鉉淙,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74). 〈韓忠熙〉









안원군 공량 매서



박세희(朴世憙) More Info.

중종(中宗)9년(1514년), 별시(別試) 갑과1(甲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91년, 신해

자(字) 이회(而晦)

호(號)

본관(本貫) 상주(尙州)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박사화(朴士華)

생부(生父)

조부(祖父) 박미창(朴美昌)

증조부(曾祖父) 박안의(朴安義)

외조부(外祖父) 신복담(辛福聃)

처부(妻父) 김성(金城)

제(弟) 박세후(朴世煦)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10(경오)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관직(官職) 옥당,승지&(玉堂,承旨&), 호당&(湖堂&)



■ 박세희(朴世熹)

1491(성종 22)∼? 조선 중종 때의 문신. 본관은 상주. 자는 이회(而晦), 호는 도원재(道源齋).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사화(士華)의 아들이다.

1514년(중종 9)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515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같은해에 홍문관수찬을 지냈다.

1517년에 정언에 임명된 후 이조좌랑·충청도도사·장령·홍문관응교를 역임하고, 1519년에 사간이 되었다. 같은해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 강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젊어서부터 조광조와 종유(從遊)하였으며, 김식(金湜)·김정(金淨)·김구(金絿) 등과 늘 교유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안원군 공량 묘갈 찬

정사룡은 ★김공량의 묘갈(정사룡 찬, 김로 서)과 김로의 묘비(정사룡 찬, 송인 서, 신효중 전액), 김성동 묘비(정사룡 찬, 김종수 서)를 찬하였고,

김충갑 신도비에 보면

---명종선조(明宗宣祖)때 최고문장인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공(公)의 사부(詞賦)를 읽어보고 당대 문장이라 항상 칭찬했으며, 혹 봄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春風 水) 즐거움이 된다고 했으며, 혹 신선의 골격이며 도인의 풍채로 여겨 물외에 표연(飄然)하며 대절(大節)이 당당해서 빼앗기지 않을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했다. --- 라 되어 있습니다.



■ 정사룡(鄭士龍)

1491(성종 22)∼1570(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 부사 광보(光輔)의 아들이며, 영의정 ★광필(光弼)의 조카이다.

1509년(중종 4)에 생원이 되고, 이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장원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516년 황해도도사로서 문과중시에 장원하였으며 사간을 거쳐 1523년 부제학이 되었다.

1534년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42년 예조판서로 승진이 되고, 1544년 공조판서로 다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4년 대제학이 되었으나 1558년 과거의 시험문제를 응시자 신사헌(愼思獻)에게 누설하여 파직되었다.

이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복직되고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1562년 다시 판중추부사에 전임되었다.

이듬해 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제거하려던 이량(李樑)의 일당이라 하여 삭직당했다.

그는 일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여러번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동안 중국인과 주고받은 시가 많았다. 중국에 다녀와서 《조천록 朝天錄》을 남겼으며, 말을 치밀하게 다듬어 웅걸차고 기이한 문구를 얻으려는 시풍을 장기로 삼았다.

특히, 칠언율시에 능하였으며, 당시 문단에서 그와 신광한(申光漢)을 쌍벽으로 꼽기도 하였다.

관료적인 시인으로 시문·음률에 뛰어났고 글씨에도 능했으나 탐학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저서로는 《호음잡고》·《조천록》 등이 있고, 글씨로는 광주(廣州)에 있는 ★이둔촌집비(李遁村集碑)가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충01齋集, 湖陰雜稿, 詩話叢林, 韓國漢文學史(李家源, 민중서관, 1961)

한국문학통사 2(조동일, 지식산업사, 1984). 〈高敬植〉









안원군 공량 묘갈 서

서운관정공파 김희수는 ★김공망과 관직생활을 같이 하였으며, 희수의 아들 김로는 ★김공량의 묘갈(정사룡 찬, 김로 서)과 ★김공예의 묘갈(성세창 찬, 김로 서)을 서하였으며, 로의 아들 김홍도는 퇴계의 문인입니다.



■ 東皐 金魯 1498(연산군 4)∼1548(명종 3)

서울600년사

【성 명】 김노(金魯) 【생몰년】 1498(연산군 4)∼1548(명종 3)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경참(景參), 동고(東皐)

【저서·작품】 《이가서법(二家書法)》, 〈제안대군침묘비(齊安大君琛墓碑)〉(글씨), 〈성청송수침묘비(成聽松守琛墓碑)〉(글씨), 〈영상정광필묘비(領相鄭光弼墓碑)〉(글씨)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서예가



1498(연산군 4)∼1548(명종 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참(景參), 호는 동고(東皐)이다. 대사헌 유연재(悠然齋) ★김희수(金希壽)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 · 서예가이다.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5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에 초임되고 이어 검열 · 정자를 지냈다. 1530년 저작(著作)으로 재직 중 ★김안로(金安老)의 석방을 비난하였다가 김안로가 다시 권력을 잡자 문의(文義)에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직제학에 기용되었으며 첨지중추부사로 재직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론(學論)에 밝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왕희지 · 왕헌지의 전기(傳記) · 필적(筆蹟)을 가지고 학습하였다. 조정의 각종 전책(典冊)과 고관명사들의 비문을 많이 썼다.

부자가 모두 명필로서 그의 필적으로 글씨를 새겨 간행한 《이가서법(二家書法)》이 있으며, 경기도 광주의 〈제안대군침묘비(齊安大君琛墓碑)〉 · 파주의 〈성청송수침묘비(成聽松守琛墓碑)〉 · 〈영상정광필묘비(領相鄭光弼墓碑)〉 등이 그의 글씨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湖陰雜稿, 槿域書畵徵

【관련항목】 김수()









동유사우록에 안원군 공량 기록 실은 박세채



목 차

간략정보

가계와 수학

이이의 문묘배향 주장

관직과 유배생활

재등용

학문과 저술

예학사상과 저술

참고문헌

박세채 필적



박세채(朴世采)

시대 조선

생몰년 1631-1695(인조9-숙종21)

본관 반남(潘南)

자 화숙(和叔)

호 현석(玄石)/남계(南溪)

시호 문순(文純)

활동분야 학자, 문신

다른 이름



1. 가계와 수학

홍문관교리 의(#의20)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그의 가계(家系)는 명문세족으로, 증조부 응복(應福)은 대사헌, 할아버지 동량(東亮)은 형조판서, 《사변록 思辨錄》을 저술한 박세당(朴世堂)·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 등은 박세채와 당내간의 혈족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순석(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7세 때인 1638년(인조 16)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고 1649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성균관생활 2년 만에 과거공부마저도 포기하였다. 원래 이이(李珥)의 《격몽요결 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하였으며, 이이를 존경하였다.

-----



참고문헌

古鮮冊譜, 朝鮮儒學史(玄相允, 1949)

資料韓國儒學史草稿(李丙燾, 1959)

韓國儒學史(裵宗鎬, 延世大學校出版部, 1974). 〈金容傑〉







▣ 김용주 - 감사함니다.

▣ 솔내 -

▣ 김윤식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