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필보(名家筆譜)의 김주(金澍) 필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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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4-06-09 19:52 조회2,609회 댓글0건본문
어제 우암집 국역화 준비 모임에서 논란이 되었던 명가필보의 김주(金澍) 필적입니다.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
1926년
백두용(白斗鏞)이 한국 역대 필적을 모아 엮은 책이다. 표제는 오세창(吳世昌)이
썼으나 서문은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고 우리 역사 4,000년간의 고금명가의 필적
700점을 모았으며, 혹 주옥같은 것이 빠졌을지도 몰라 완벽은 훗일을 기한다고 했다. 구성은
서문을 넣고 권마다 첫머리에 인명의 약전을 적은 뒤 수적(手蹟)을 나열하였고 끝부분에
전각을 넣었으며, 편집자의 말을 실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역대 서예가
인명을 나열하였고, 수적이 빠짐없이 실려 글씨의 변천과 필적을 한 눈에 알
수 있어 서예사적으로 매우 중요 자료가 된다. 6권,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어제 논란이 되었던 김주의 필적은 명가필보 6권중
1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위 두 번째 사진을 보면 김주(金澍) 號 籠巖 先山人(호
농암 선산인) 이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한국학을 검색해보면 농암 김주의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김주(金輳){3}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충신. 본관은 선산. 호는 농암(籠巖).
아버지는 예의판서(禮儀判書)
원로(元老)이며, 어머니는 수주김씨(水州金氏)이다.
1392년(공양왕 4)에 하절사로
명나라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개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 유씨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느니 내가 강을 건너가면 몸둘 곳이 없다.”라는
편지를 쓰고, 또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양수(揚燧)라 할 것과 조복(朝服)과 신을
부치니 부인이 죽은 뒤에 합장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후손들은
조복 등 유품을 보낸 날에 제사를 지냈다. 그가 중국에 들어가자 명나라 태조는 그에게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임명하였으나 끝내 사양하므로 평생동안 그에 해당하는 녹(祿)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중국의 형초(刑楚)에 살았고, 3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전한다.
1597년(선조
30) 일본으로 파견된 사행(使行)의 막하관으로 수행한 허유성(許惟誠)이 그의 외손이라고
전하며, 명나라 고공(高珙)이 엮은 《병탑유언 炳#탑06遺言》에는 그의 자손이 대대로
통주(通州)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농암일고》 1책이 있다.
위 자료로 볼 때 명가필보의 농암의 휘와 디지털한국학의
농암의 휘가 한자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澍 → 輳)
1926년
백두용이 명가필보를 필적을 모을 당시 착오가 있지는 않았는지, 무었을 참고자료로
하였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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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홈에 올라있는 서화가인명사전의 김주(金澍) 필적
우리 홈 에 올라있는 김주(金澍) 필적은 2000년 범우사(저자, 한문영)에서 출판한 한국서화가인명사전에 수록되어있는 내용입니다.
최근에 출판 된 서적으로 자료 수집 당시에 무었을 참고로 하였는지도 조사 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해동명가필보와 비슷한 시기에 출판되었고 말미에 원전을 밝히고 있는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김주의 필적이 수록되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크로스체킹을 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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