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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명가필보(名家筆譜)의 김주(金澍) 필적에 대하여...(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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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04-06-09 23:04 조회1,8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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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일선)김씨 홈에서 퍼왔습니다



김 주(金 澍)



자는 택부(澤夫)며 호는 농암(籠巖)으로 1365(공민왕 14)년에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독서당곡(독서당곡)이라고 하는 도개면농암촌(桃開面籠巖村)에서 수학하여 우왕(禑王) 때에 등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공양왕(恭讓王) 때인 28세에 예의판서로 하절사(賀節使)가 되어 남경을 다녀오던 중 압록강에서 역성 혁명으로 조선이 개국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공은 3일동안 통곡하고 부인에게 서찰을 보내어 "충신은 불사이군이니 내 만약 강을 건너면 몸둘 곳이 없을 것이오. 이미 부인이 잉태하였음을 알고 있으니 만약 아들을 얻으면 이름을 양수(揚燧)라 하고 딸을 얻으면 명덕(命德)이라 하시오. 또한 내 조복과 신발을 신물(信物)로 보내니 부인이 유명을 달리 할 때 이 물건들을 합장하여 우리 부부의 묘를 하고, 내가 강을 떠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날을 나의 기일로 할 것이며 결코 지문묘갈(誌文墓碣)을 쓰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은 표연히 중국으로 되돌아가니 중국의 명태조는 공의 높은 절의에 감동하여 본국에서와 같은 예부상서의 벼슬을 제수했으나 끝내 받지 않고 평생 형초(荊楚)땅에 숨어살았다. 그러나 명태조는 특명으로 종신토록 예부상서의 록을 지급하게 하였다. 후세에 그 높은 덕을 추모하여 선산군도계면 월림동(月林洞)에 월암서원(月岩書院)을 창건하여 공을 배향하였으며 1694년(숙종 20)년에 상의(尙義)라 사액하였다. 1798년(정조 22)년에는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부조지명(不조之命)까지 내리고 왕은 친히 내격묘(來格廟)란 묘호와 함께 제문을 지어 좌승지 이익운(李益運)으로 하여금 치제케하였다. 월암서원 외에도 안동 고죽서원(孤竹書院)·양산 송산서원(松山書院)·고창 운곡서원(雲谷書院)·곡산 동진사(東津祠)에서 향사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명종18(1563)년 9월 27일(임인)



동지중추부사 김주(金澍)가 졸했다. 주의 자(字)는 응림(應霖)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다. 종계 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주청사에 충당되어 북경에 가서 예부에 청하여 제지(帝旨)를 받아냈는데 그 길로 옥하관(玉河館)에서 졸하니 상이 그에게 주청한 공이 있다 하여 예조판서를 특증(特贈)했다. 문장에 능하여 동류들의 추중하는 바가 되었다.









▣ 솔내 -

▣ 김항용 -

▣ 김윤식 -

▣ 김주회 - 영윤대부님! 가슴 속 답답함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 김용주 - 대부님 감사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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