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이야기] 白凡과 쇠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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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6-11 17:56 조회1,461회 댓글0건본문
[남도이야기] 白凡과 쇠실마을
日장교 죽이고 이곳서 도피생활은거비 세워지고 후대까지 교류
[조선일보 권경안 기자]
1898년 여름으로 접어드는 어느 날 전남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 마을에는 남루한 옷차림을 했지만 대단히 건장한 청년이 찾아 들어왔다. 김두호(金斗昊)라고 했다. 그가 찾아든 곳은 쇠실 마을 동편 안동 김씨 집이었다. 머물렀던 기간은 40여일이었다.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다. 그는 다시 어디론가 떠났다. 그가 보살펴준 은덕에 감사하며 종친 김광언(金光彦)씨에게 역사책을 남겼다. 이 책의 속표지에는 김두호(金斗昊)라는 서명과 한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이별하기 어렵구나 이별하기 어렵구나 /헤어지는 곳에서 일가의 정이 솟는다 /꽃 한 가지를 반씩 나누어 /한 가지는 종가에 남겨 두고 떠나네 /이 세상 살아 언제 만날 것인고 /이 강산을 떠나기 또한 어렵구나 /넷이 함께 놀기 한 달이 넘었는데 /일이 어긋나 아쉽게 헤어지며 떠나는구나.
그리고 48년이 지난 1946년 9월. 이 쇠실 마을을 다시 찾은 사람은 김두호가 아니라 바로 전 해 임시정부활동을 마치고 귀국했던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이었다. ‘보은(報恩)’의 방문이었다.
그가 쇠실 마을에 김두호라는 이름으로 숨어들었을 때, 그는 쫓기는 탈옥수 신분이었다. 일본인을 죽인 죄목이 그를 따랐다. 선생은 당시 인천에서 탈옥, 삼남지방을 유랑하며 절치부심하던 시절이었다. 일본세력이 친러시아경향을 보인 민비(명성황후)일파를 제거한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하던 중, 1896년 2월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였다. 체포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인천감리영에서 탈옥한 것이었다.
백범이 은거했던 그 쇠실마을엔 그 발자취가 전하고 있다. 그를 숨겨주었던 김광언씨의 집에는 ‘백범 김구선생 은거비’가 대문앞에 서 있다. 김광언의 손부가 살다가 최근 몸이 불편해 광주에 있는 아들집으로 옮겨 거처하고 있다.
그 집안으로부터 김구 선생이 마을 청년들에게 역사를 가르쳤던 이야기를 비롯, 먹을 것이 부족해 콩잎죽을 쑤어 드셨다는 이야기, 떠날 때 모시한복과 밀대모자를 드렸다는 이야기, 다시 방문했을 때 솔가지로 문을 만들어 환영했다는 여러 사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윗대의 교류는 후대에까지 이어져오고 있었다. 해마다 김구선생의 추모제에 참가하고 있다. 김구 선생과 연을 맺은 이 김씨 집안은 넉넉하고 훈훈한 분위기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중등교사인 한 후손은 “어린 시절부터 김구선생과의 인연을 늘 듣고 자라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고도 말했다.
( 권경안기자 gakwo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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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내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김윤만 -
▣ 김발용 - 재작년 여름 캠프 후에 항용님 가족과 들러보았던 보성의 안동김씨 세장지와 김구선생님 은거지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 김태우 -
▣ 김홍묵 -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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