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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선생 서거 55주기… 감회 남다른 범민련 신창균 명예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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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6-25 22:40 조회1,5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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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암살 책임 미국에 사과·배상 제기”

김구선생 서거 55주기… 감회 남다른 범민련 신창균 명예의장





“백범은 남북을 아우르는 통합주의자요,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보다도 민족을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지금 살아계셨다면 통일운동의 총지휘자로 활동하실텐데….”



백범 김구선생 서거 55주기(26일)를 맞아 누구보다도 남다른 감회에 젖어있는 신창균(97)옹.



“눈이 어둡고 귀가 멀어 총명기가 떨어졌다”는 신 옹은 현재 갖고 있는 직함만도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백범정신) 수석대표, 통일연대 명예대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명예의장 등이다.



24일 경기도 과천시 별양동 그의 23평짜리 주공아파트에서 가진 인터뷰는 원활한 진행을 위해 ‘백범정신’ 사무처장이며 7년째 신옹의 신변 수발을 하고 있는 홍원식(43)씨의 도움으로 진행됐다.



충북 영동 태생인 신옹은 12세때 3·1운동을 겪었고 충북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0년간 교사생활을 하다가 1940년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남중국 광둥(廣東)성에서 빵 행상을 거쳐 마카오에서 성냥무역업을 했고 광둥전력회사 부사장직에까지 오르는 큰 성공을 거둬 당시 상하이(上海)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아가자 김구선생의 최측근이었던 조완구씨와 엄항섭씨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6년동안 마카오 연락책임자를 지내고 광복 이후 환국했는데, 어느날 조완구씨와 엄항섭씨가 김구선생님을 소개시켜 주더군요. 경교장에서 처음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선생님은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건 같이 항일투쟁을 했다면 모두 동지라고 하셨죠. 그분은 한 마디로 이념을 넘어서는 분이었습니다.”



신옹은 46년 5월 한국독립당(한독당·당수 김구선생)이 출범하면서 자신이 평생 존경하고 그분의 길을 걷게 된 김구선생과 함께 활동을 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연락부장을 시작으로 재정부장, 재정위원장, 상무위원, 상무위원회 최고위원까지 지냈고, 48년 4월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남북협상 한독당 대표 8명에 포함돼 북한에 갔다. 모란봉극장 사무실에서 30여분간 김일성 당시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독대한 신옹은 “우리는 남북통일정부 구성을 위해서 온 것이지, 인민공화국 구성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며 결국은 실패로 끝난 협상당시를 회고했다.



백범의 죽음과 관련해 “(2001년 9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문서공개로 암살범 안두희가 미군방첩대(CIC) 정보원 노릇을 했고 우익청년단체인 백의사(白衣社)의 특공대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난 그전부터 이승만과 미국의 공모에 의한 것이란 심증을 갖고 있었다. 문서가 공개된 이상 앞으로 미국 대통령의 사과와 배상문제를 제기하려 한다”고 밝혔다.



“내가 하나님을 뵐 날이 멀지 않았지만 그때까지 통일운동을 계속할 것”이라며 “21세기 민족통합의 전당이 되어야 할 백범기념관 운영을 범민족적 기구로 한 후에 기념관을 이용하는 것이 백범정신에 어울리는 자세일 것”이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김윤림기자 bestman@

문화일보 기사 게재 일자 2004/06/25







▣ 김항용 -

▣ 김태도 - 잘 읽었습니다.

▣ 김윤만 -

▣ 김윤식 -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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