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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公과 李承休 07 ---은거지 주변풍경 및 생활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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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02 20:08 조회1,5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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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한국학

○이승휴(李承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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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휴는 충렬왕6년(1280) 그의 나이 57세에 전중시사로서 감찰사의 관원들과 함께 충렬왕의 失政과 附元세력가들의 횡포를 비판한 10事를 上疏했다가, 다시 파직되어 삼척 두타산으로 돌아온 후 佛經을 10년 넘게 耽讀하였다.

이때에 서장관으로 있었을 때 지은 詩와 日記 등을 모아 [賓王錄]이라 했으며, 그가 거처하는 堂號를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하여 容安堂 이라 했다.

이승휴는 [빈왕록] 저술로 시작하여, 64세에 [帝王韻紀], [內典錄]을, 66세에 [보광정기]를, 71세에 [간장사기], [제왕운기] 初刊을 이룩하였다.





이승휴의 이곳 삼척 두타산 아래 구산동(현재의 천은사)에 은거하면서의 주변풍경이나 생활자세 등은 <동안거사집>에 실려 있는 그의 雜著를 보면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습니다.



● 村居自戒文촌거자계문 (향촌에 살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지은 글이란 의미)

● 葆光亭記보광정기 (1289년)

● 看藏寺記간장사기 (1294년) 등









■ 동안거사 雜著 一部

成均直講 지제교 李衍宗(=이승휴 아들) 編

家君(=이승휴)께서 평소에 著述한 四六 雜文은 서울(=개성)을 떠나 고향(=삼척)으로 갈 즈음에 다 흩어져 남은 것이 없었다. 晩年에 지은 약간 편을 엮어서 雜著 一部로 삼는다.



● 葆光亭記보광정기



頭陀山두타산의 中臺洞중대동은 기이하고 절묘하여 신기한 경치를 다 드러냈고, 묶어 놓은 듯도 하고, 편편하기도 하며, 옹기종기 땅을 凝縮응축해 놓은 듯한 곳이다. 거기에다 거닐고 의지하기 편리하니9) 그 아름다움을 이루 다 형용하기가 어렵다. 만일 東坡동파가 이곳을 본다면 의당 西施서시10)로써 비교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 노닐며 구경하는 운치는 곧 十四觀詩십사관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중대동의 동북쪽으로 하나의 봉우리가 홀로 솟아 머리처럼 생기어 펑퍼짐하게 흘러내리는 산봉우리가 있으니, 그것은 (大文,山+由)대문수라 부르고, 대문수 남쪽에 솔밭처럼 솟아 일어난 것이 훌쩍 날아오르는 듯한 것은 三公峰삼공봉이고, 비스듬히 경계진 양쪽 골짜기 사이에 돌고 굽이져서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布鋪川포포천이다. 내의 북쪽에 문수봉에 딸린 겹친 산언덕이 있는데, 이곳은 삼공봉을 바라보고 있으며, 우묵하고 널찍하여 물이 안고 도는 곳으로서, 특별히 하나의 작은 구역을 이루고 있으니, 이곳이 龜山洞구산동이다.



구산동을 가로질러 서북쪽에서 동남으로 콸콸 흘러가는 물줄기가 龍溪용계이다. 용계를 따라 양쪽 가에 밭 二頃이경이 있으니, 이것은 동안거사 외가에서 전해오는 바의 柴地11)시지이다. 땅은 비록 메마른 박토이지만 몇 식구의 집안이 의지해서 먹고 살 만하다. 이에 시내의 서쪽 밭의 잘록한 언덕 위에 집을 짓고, 陶淵明도연명의 歸去來辭귀거래사에 나오는 ‘審容膝之易安12)심용슬지이안’ 이란 구절의 글귀를 취하여 容安堂용안당이라 이름하였다.



堂당의 남쪽에 차가운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샘이 있는데, 가물어도 더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많아지지 않으며, 차고도 차가워서 시원한 기운이 사람을 엄습하여, 손으로 움키기도 전에 몸이 이미 청량해진다. 그로 인하여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 대나무를 섞어서 심고, 화초를 빙 둘러 심어 놓으니 비록 소박하여 화려하지는 않으나, 누추한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南華眞人13)남화진인의 齊物篇제물편에 나오는 글귀인 ‘물은 주입해도 가득해지지 않고, 퍼내도 마르지 않으며 그 나오는 근원을 알 수가 없는데 이것을 葆光보광이라 한다.’를 취하여 이름을 葆光亭보광정이라 하였다.



보광정 가운데에 엷은 돌을 깔아서 자리를 만들고, 그 가운데 작은 우물을 파서 음식 짓는데 쓰일 수 있도록 해놓고, 雪堂居士설당거사 蘇東坡소동파14)의 田中詩전중시의 ‘한번 배부름은 기약할 수 없으나 한 바가지 물은 기필할 수 있다.’ 라는 시구를 취하여 瓢飮渟표음정이라 하였다. 보광정의 아래쪽에 네모진 모양의 연못을 파서 蓮연을 심고 물고기를 기르니, 큰 은어가 연꽃과 연잎 사이에 떴다 잠겼다 하며 헤엄치고 노니니, 제자리를 찾아 그 쉴 곳을 얻은 듯하였다. 이것이 바로 물고기의 즐거움이라 하겠도다.

또 ‘어찌 내가 고기의 즐거움을 모름을 알겠는가’ 라는 莊子장자의 齊物篇제물편의 말을 취하여 知樂塘지락당이라 이름 지었다. 마침 장삼을 입고 竹杖죽장을 짚고, (鶴,衤敞15)학창을 걸치고 (실사변,車빼고輪,巾)윤건을 쓴 자가, 시원한 바람을 타고 왔다. 인도하여 더불어 못가에 앉아서 맑고 아담한 담소 끝에 반드시 맛난 술은 아니더라도, 있는 그대로 잔질해 따르어 먹으니, 마시는 술은 부족하나 맑은 즐거움은 끝이 없었다. 술에 의탁해 산과 물의 흥취에 흠뻑 취하였다. 인하여 산보하며 흥얼거려 노래를 지어 부른다.



이 산이여, 기이하고도 안온하도다.

여생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벼슬에서 물러난들 어찌 재미가 없을손가.

임금의 성덕을 노래하며 영원히 전함이여.

海藏16)해장을 옮겨다가 遐壽하수를 축원하도다.

여기에서 우리 임금을 받듦이여!

굳이 東華門17)동화문에 추창하여 나아가야만 하랴.



옆에 손님이 있어서 그것을 써서 보광정기로 삼는다.

때 至元18)지원 26년(1289) 6월 일







● 看藏寺記간장사기



간장사란 옛날 容安堂용안당이요, 용안당이란 동안거사가 장차 海藏해장을 열람하려고 지은 것이니, 그 내용이 보광정기에 기록되어 있다.



---생략---



진실로 乾位건위가 龍飛용비함49)을 만나 외람되이 晉臣진신의 蛇從50)이종을 하게 되었다. 말안장을 짊어지고 충렬왕을 따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닐 적에 다행히 약간의 공로를 쌓았다. 사다리도 없이 곧바로 靑天청천에 오르매51), 화려한 품계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의 천박한 자질로서 이렇게 오래도록 한가함을 얻게 되어, 궁궐의 淸嚴52)청엄을 울며 하직하고, 碧山벽산의 궁벽한 곳에 붙여 살게 되었구나. 이웃에 절53) 하나가 있으니, 불경이 천 상자나 있었다.



옛날 매우 바쁜 일에 얽매였을 적에는 마음에 있어도 시간을 낼 수 없었는데, 지금 산림에 있어 일이 없으니, 마땅히 내가 시기가 왔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는 것도 달갑게 여기나니, 寸陰촌음을 한자의 구슬처럼 보배롭게 여겨야겠다. 그래서 마치 좋고 묘함과 근원을 찾기 어려운 말을 눈으로 대하고서, 대롱으로 엿보는 격이고 아득하고 한량없는 푸른 바다를 마음에 두고서 작은 소견으로서 헤아리고자 함과 같았다. 六時육시로 책상을 대하고 한결같이 향을 피웠다. 庚辰年경진년(1280) 10월에서 己丑年기축년(1289)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다 보기는 했으나, 지식이 얕고 根機근기가 미약하여 비록 임금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는 못했어도, 日就月將일취월장이 되었으니 어찌 섭렵의 좋은 인연이 아니겠는가. 책은 깨끗하고 창은 밝으니 기쁨이 깊고 맛도 좋더라.



이미 孔子공자의 쇠를 부러뜨림(折鐵절철)을 밝혔으니 어찌 象상 없음이 구슬을 찾아낼 것을 알지 못하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배우고 때로 익히면56), 충성을 바칠 데는 나라와 임금일 뿐이다. 마음과 마음은 한 사람의 洪造57)홍조를 생각하니 한 마음으로 언제나 한 사람을 연모하고, 軸축과 축은 왕의 万壽만수가 항상 편하기를 기도하니 万軸만축이 모두 만수무강 올린다.



삼가 원하옵건대, 우리 주상 폐하께서는 말씀과 행위가 廣大無邊광대무변하여 온 세상의 땅끝까지 모두 와서 복종함을 앉아서 보고 恩愛은애가 앞에 가득함에 태평승세의 음악을 늘 들으며, 왕비는 琴瑟금슬로 복록을 누리는 교화를 밝히시고58), 震邸진저59)는 椒衍60)초연의 번성할 상서가 엉키도록 하소서. 또한 자제들은 世世生生세세생생 이 마음을 지켜 가시어, 걸음걸음마다 彼岸61)피안에 영원히 오르소서. 이 세상에서 살든 세속을 초월하여 살든 간에 達者62)달자와 같이 노닐고 以心傳心이심전심으로 막힘 없이 크게 깨치기를 원하노이다.



이 誓願서원을 통하여 저 沈淪침윤한 사람들63)을 구제할지어다. 이에 최후의 供養絶句詩공양절구시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얕고 푸른 산 기슭에 조그마한 암자를 지으니,

밝은 창 십년 동안 천 상자의 불경을 읽었네.

田地전지를 희사하고 布施보시를 바치니ㅣ 이름하여 看藏寺간장사라.

영원히 禪門선문의 맑고 좋은 가람 되었네.





지난 甲午年갑오년(1294) 봄에 이 동구에서 나왔다. 廣川광천 아래 二水이수 사이에 약간의 버려진 공한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인하여 安集使65)안집사에게 허가를 받아서 또 간장사에 바치니, 전후 합한 것이 세속에서 말하는 7.8結66)결이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常住상주하면서 齋재를 올리고 공양하는 밑천으로 삼았다. 上朝67)상조의 皇帝황제의 御位어위는 萬年만년을 누리시고 本國본국 주상폐하와 왕비, 세자가 각각 千秋천추토록 보존하기를 축원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절은 경역이 마을과 접하여 그다지 외로이 떨어져 있지 아니하고 집은 무릎을 펼 정도로 작고, 또한 검소하여 꾸밈이 없으니, 그 高人達士고인달사가 구름 속에 깃들고 煙霞연하 속에 隱遁은둔하려는 뜻에는 아마도 부응되지 못할 듯하다. 그러나 밝은 달은 물결에 은은히 비치고 차가운 샘물은 흰 물줄기를 쏟아내니 못에 임하여 잔치를 벌여 앉게 되면 정신을 편안히 하기에 족하다. 또 옛 성인이 말하기를, “때가 末世말세를 당하여서는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인가 근처에 풀을 엮어 집을 짓고 편히 참선을 한다.” 하였으니 그 뜻한 바가 까닭이 있다. 청컨대 모든 고인 달사는 이곳에서 머무소서. 또 우리 자손들도 幹蠱68)간고에 대하여 잊지 말아야겠다.



後人후인들이 연유를 알지 못할까 염려되어, 이에 그 사실을 쓴다.

至元지원 31년(1294) 갑오 시월 일









▣ 김항용 -

▣ 김태도 - 잘 읽었습니다.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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