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烈公과 李承休 08 ---1287년 제왕운기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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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03 17:21 조회1,540회 댓글0건본문
■ 이승휴(李承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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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휴는 충렬왕6년(1280) 그의 나이 57세에 전중시사로서 감찰사의 관원들과 함께 충렬왕의 失政과 附元세력가들의 횡포를 비판한 10事를 上疏했다가, 다시 파직되어 삼척 두타산으로 돌아온 후 佛經을 10년 넘게 耽讀하였다.
이때에 서장관으로 있었을 때 지은 詩와 日記 등을 모아 [賓王錄]이라 했으며, 그가 거처하는 堂號를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하여 容安堂 이라 했다.
이승휴는 [빈왕록] 저술로 시작하여, 64세에 [帝王韻紀], [內典錄]을, 66세에 [보광정기]를, 71세에 [간장사기], [제왕운기] 初刊을 이룩하였다.
■ 1200년대 후반 시대상황
나라의 주체가 무너지고 주권이 흔들릴 때에는 민족 자존과 자긍심을 일깨우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몽골의 침략 시기와 원나라 지배 시기에 역사책 편찬이 활발했던 것은 이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편찬된 고려 후기 역사서들은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제왕운기 등이 있다.
삼국사기의 역사 인식에 정면으로 반발했던 사람은 이규보(1168-1241)였다. 그는 <동명왕편>을 지어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건국 설화를 소홀하게 다룬 사실을 정면으로 지적하였다.
실로 이규보는 몽골 침략을 염두에 두고 당시 널리 읽히는 관찬 역사책인 <삼국사기>가 자주성을 강조하지 않은 점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그는 고구려의 강한 민족정신을 계승하여 국난을 타개하는 시대정신을 함양시키겠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원 지배하에 있을 때 승려 일연(1206∼1289)에 의해 <삼국유사>가 출간되었다. 일연은 당시 불교계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승려였다. 그는 운수행각 중에 고통에 빠져 있던 민중에서 삶의 희망을 주기 위해 전국을 떠돌면서 보고 겪은 이야기를 하나의 책으로 묶고자 하였다.
<삼국유사>에 이어 이승휴(1224-1300)에 의해 <제왕운기>가 완성되었다. 그는 비리를 보면 참지 못하는 올곧은 선비로, 조정의 폐정을 시정하려다가 걸핏하면 쫓겨났다. 개성이 강한 지성인이었고 개혁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행동파였다. 그러나 자신의 뜻이 좌절되자 산속에 묻혀 불경을 읽고 저술에 몰두하였다.
<제왕운기>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운문체로 엮은 책이다. 우리나라 역사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요하 동쪽 땅에 따로 한 천지가 있으니 뚜렷이 중국과 구획을 지어 나누어져 있도다. 큰 파도 만경에 걸쳐 삼면을 에워싸고 북쪽에 육지가 줄처럼 이어져 있네. 가운데 땅덩이 천 리가 바로 조선이니 강산의 아름다운 경치, 그 이름 천하에 퍼졌구려."
그는 우리나라의 자연 환경을 먼저 설명했고, 중국과 구분되는 당당한 자주 독립국임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그는 중국책을 참고하여 <삼국사기>에서 빼버렸던 단군, 위만, 발해를 역사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 제왕운기 (帝王韻紀)
1287년(충렬왕 13) 문인 이승휴(李承休)가 저술한 역사시(歷史詩).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함께 고려시대에 찬술한 3대사서(三代史書)의 하나로 상·하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권에서는 중국의 반고(盤古)로부터 금(金)까지의 역사를 7언시로 노래했다. 하권에서는 한국사를 2부로 나누어, 제 1 부에서는 동국군왕 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라 하여 지리기(地理記) 및 상고사(上古史)를 1460구절의 7언시로 읊었으며, 제 2 부에서는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라 하여 고려 태조로부터 충렬왕대까지의 사실(史實)을 700구절의 5언시로 엮은 것이다. 특히 하권에 실려 있는 단군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함께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 뒤 1360년(공민왕 9), 1413년(태종 13)에 각각 중간(重刊)되었는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중요한 판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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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원나라의 정치적·문화적 지배체제를 극복하고자 저술된 이 책은, 중국과 한국의 지리적·문화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중국과 다른 민족문화적 주체성을 표명하였다. 이는 난세극복의 의지를 표명함에 있어 역사에 그 가치기준을 두고 저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학사적 측면에서 볼 때 단군기원의 역사의식 환기와, 몽고 간섭하에서 싹튼 민족의식과 함께 상고사를 한국사에 편입시켜 다루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인쇄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문화재청
1 보물 418 제왕운기<상,하권>(帝王韻紀<上,下卷>) 서울 종로구 (소유자 곽영대)
2 보물 895 제왕운기(帝王韻紀) 서울 중구 동국대학교도서관 (소유자 동국대학교)
3 보물 1091 제왕운기(帝王韻紀) 서울 종로구 삼성출판박물관 (소유자 김종규)
문화재명 제왕운기(帝王韻紀)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의 문인(文人) 이승휴(李承休)(1224∼1300)가 중국(中國) 역사(歷史)와 우리 나라의 역사(歷史)를 운문(韻文)으로 적은 책으로 상(上) ·하(下) 2권이며 상권(上卷)은 중국역사(中國歷史)를, 하권(下卷)은 우리 나라의 역사(歷史)를 서술(서述)하고 주기(註記)를 붙였다.
중국(中國) 역사(歷史)인 상권(上卷)은 2,330언(言)의 7언시(言詩)로 서술(서述)하였고, 우리 나라의 역사(歷史)인 하권(下卷)은 1 ·2부(部)로 나누었는데 제 1부(部)에는 ‘동국군왕개국년대(東國君王開國年代) ’라 하여 먼저 지리기(地理記)를 적고 다음에 단군조선(檀君朝鮮) ·기자조선(箕子朝鮮)(후조선(後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 ·한사군(漢四郡) ·삼한(三韓)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부여(扶餘) ·후고구려(後高句麗) ·백제(百濟) ·후백제(後百濟) ·발해(渤海)를 1,460언(言)의 7언시(言詩)로 기술(記述)하고, 제 2부(部)는 ‘본조군왕세계년대(本朝君王世系年代) ’라 하여 700언(言)의 5언시(言詩)로 고려초(高麗初)부터 충렬왕(忠烈王) 때까지를 기술하였다.
이 책은 권수(卷首)에 지원이십사년(至元二十四年)(충렬왕(忠烈王)13, 1287) 3월(月)에 쓴 저자(著者) 이승휴(李承休)의 서(序)가 있고 권말(卷末)에 양온령(良온令) 정소(鄭소)의 발(跋), 부사(副使) 이원(李源), 안염사(按廉使) 안극인(安克仁)의 후제(後題)가 있으며 그 뒤에 ‘지정이십년경자(至正二十年庚子)(공민왕(恭愍王)9, 1360) 5월(五月) 일(日) 동경개판(東京開板)…… ’이란 간기(刊記)가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는 원정년간(元貞年間)(1295∼1296)에 진주부사(晋州副使) 이원(李源)이 왕명(王命)으로 진주목(晋州牧)에서 개판(開板)하였고, 공민왕(恭愍王)9년(年)(1360) 5월(月)에 경상도안염사(慶尙道按廉使) 안극인(安克仁)이 경주(慶州)에서 중간(重刊)하였는데 글씨는 김희(金禧)가 썼다. 이 책은 경주판(慶州板)이기는 하나 후쇄본(後刷本)인 여말(麗末) 선초(鮮初)에 간행(刊行)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제왕운기(帝王韻紀)는 그뒤 태종 7년(1417)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지강(李之剛),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승간(李承幹) 등의 주관으로 경주(慶州)에서 3판이 나왔다.
이 여말각본(麗末刻本)의「제왕운기(帝王韻紀)」는 보물(寶物) 제(第)418호(號)로 이미 지정된 바가 있거니와, 본서(本書)는 권수(卷首)(표(表)) 1장이 결락(缺落)되고 하권(下卷) 제 6장이 결락(缺落)되었으며 동(同) 제 8장은 타판본(他板本)이 보입(補入)된 것이기는 하나, 여말선초(麗末鮮初) 간본(刊本)으로 기왕(旣往)에 발견(發見)된 것과 대비(對比)할 수 있는 자료란 점에서 서지학(書誌學) 연구(硏究)에 중요한 자료이며 역사학(歷史學) ·한문학(漢文學) 연구(硏究)의 자료(資料)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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