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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忠烈公과 李承休 08 ---1200년대 후반 시대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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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03 17:25 조회1,6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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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보이는 일연의 역사인식에 대하여



1. 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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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고려후기의 충렬왕 7년(1281)경에 완성된바 승 일연의 사찬(私撰)이다. 그리고 이는 대체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는 140년 뒤에 각훈의 해동고승전보다는 70년 뒤에 편찬된 불교신앙 관계를 포함하는 역사에 관한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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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

고려 의종연간에 와서 폭발한 무인정변은 전통적인 문벌중심,문치편중의 귀족정권을 붕괴시킴으로써 고려사회의 전개방향을 크게 전환시키는 분수령이 되었다. 이제 이른바 고려후기 사회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무인의 집권을 계기로 고려후기의 학자적 관료인 신진 사인(士人)층이 역사 추진세력으로서의 새로운 의의를 지니면서 등장하는 것이다. 또한 무인의 집권을 계기로 고려 불교에는 저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창도한 바 교려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선종의 새로운 발전이 일어나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중기에 와서 극성을 보이게 된 문신 귀족정권은 왕도중심,중앙귀족 중심의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지배체제는 지방저 호족적인 사회세력의 정치참여를 거부하는 방향의 독선을 자행함으로써 점차 기층사회와의 괴리를 크게 해갔는데, 이에 복무한 것이 유교적 전제정치의 이념이었다. 유교이념에 의거한 중앙 귀족정치의 전제화에 따라 국가와 사회, 정권과 민중사이의 유리가 보다 크게 초래된 것이다. 뿐아니라 이러한 유리의 필연의 귀결은 오히려 그 지배체제 내부의 반목과 전통적인 자주의식의 상실이었다. 귀족 지배체제는 사회와 민중으로부터의 이질적인 유리에 따른 자체의 취약성을 도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체제내의 반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래 야만시해온 여진에 대한 신사(臣事)도 부득이하였으며, 나아가서는 비록 현실성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여진을 제압한다고 표방하고 나선 묘청 등의 칭제건원 운동과 이 운동의 가능지반이었던 전통적인 자주의식마저 잔해하는 독선을 자행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러한 유교적 전제적 문신 귀족정권의 독선적인 승리의 기념물과 같은 것으로 편찬되었다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주의할 바는 이러한 문신귀족의 지배체제와 공생공영의 관계를 구축하고 있던 것이 화엄,천태로 대표되는 귀족적인 교종의 불교세력이었다는 사실이다. 뒷날 화엄종사 각훈의 "해동고승전"도 이러한 번영의 여광의 산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제 무인의 정변과 집권은 이러한 문신귀족의 지배체제를 도되시키기는 하였다. 그러나 무인정권의 폭압 역시 사회와 역사의 바른 질서의 회복을 실현하는 길과는 거리가 멀었다. 새로운 무단의 살육과 독재가 계속하는 가운데 문화의 암흑기를 초래한 것은 물론이요, 중기 문신귀족의 횡행이래 발달하기 시작한 사적대토지 횡탈에 따른 농장은 이에 이르러 한층 더 급격히 성장하게 되었다. 남북 각처에서는 농민 노예의 반란이 잇따르고 있었다. 더구나 여기에 강포한 이민족의 침략이 닥쳐왔다. 고종 18년(1231)이래 계속된 몽고의 야만적인 침랴과 지배는 참절무비의 민족적 분노와 좌절을 체험케 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 같은 문무의 독선적인 정권이 자행한 폭압을 겪으면서 그리고 몽고와의 30년 항쟁을 치르면서 그 체험의 최전선을 직접 담당하였던 민중 속에서 직접 양성될 수 밖에 없는 분노와 저항의 의식이 축적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돌파구를 봉쇄당한 민중의 분노와 저항의식은 곧 역사전통에 대한 민족적 의식으로 심화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심화된 민족적 의식이, 보다 지방적이며 보다 민중 속에서 성장해온 신진 사인층이나 신흥의 선승들에게서 더욱 구체적인 인식을 보이게 되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몽고의 침략 이전, 고려 조계종의 2세종주 혜심(1178-1234)은 "선문염송집"을 찬하면서, "더구나 怡나라는 조성의 삼한 통합이래 선도로써 국운을 떨치고 교학으로써 인병을 진압해왔으니, 여기 종지(宗旨)를 깨치고 도를 논구할 전자(典資)가 지금과 같이 절급할 수가 없다. 종문학자들이 목마름에 마실 것을 바라며 배고픔에 먹을 것을 생각하듯 함이 바로 그 때문이다. 이제 학도들의 역청(力請)을 입고 조성의 본회(本懷)를 생각하여, 나라를 복되게 하고 불법에 보비(補裨)함이 있게 하기 위하여"라고 그 편찬의 동기를 밝히었다.



경도에의 요치를 위한 최씨 무인정권의 갖가지 역청에는 불응한 채 평생을 산간에서만 마쳤던 그로서도 여기 그다지 절급하게 의식되었던 것이 조성(祖聖)에서 전승되어 온 역사전통의 새로운 발견과 그 회복을 위한 국가사회적인 요청이었음을 주의할 일이다.



동시대의 신진 사인 이규보(1168-1241)는 저 고구려 창국의 영웅 동명왕의 사적을 읊으면서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도읍임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그 동기를 밝히고 있다. 자국의 역사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부의식의 체현이었다 할 것이다. 문신 무인을 막론하고 사회와 민중으로부터 유리된 독선적인 귀족정권의 파벌적인 체질과는 달리, 이들 신흥의 지식층은 보다 넓은 국가적인 차원의 민족의식, 자기의 역사전통에 대한 긍정의 새로운 인식을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곧 이러한 의식의 전승에서 빚어진 산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전승에서가 아니라, 흉포한 몽고를 상대로 한 30년 민족의 대항전 속에서 더욱 발전적으로 심화되고, 마침내 뿌리칠 수 없게 된 이민족의 압제라는 현실의 제약하에서, 신흥의 고려 조계종과 일체 관계에 있던 선승 일연(1206-1289)의 손을 빌어 민족의 역사에 관한 일대 서사를 낳게 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동시대의 소산인 "제왕운기"가 현실사회에서는 좌절을 면치 못하고 마침내 벽지로 은둔할 수 밖에 없었던 신진 사인 이승휴(1224-1300)의 손에서 이루어진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할 것이다.



3. 전통의식의 내연(內燃)과 그 발전적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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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나 이승휴는 기본이 이른바 합리적이라는 유학의 전공자였다. 이 같은 유자에 있어서도 역사 속의 신이는 실재와 결코 모순되지 아니하는 혼융의 일체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삼국유사"의 경우 더욱 현저하다. "삼국유사"는 창국의 시조들뿐만 아니라 그 수성의 군왕, 나아가서는 일반 서민의 일에 이르기까지, 기이에서 효선에 이르는 전편의 서사를 기본적으로 신이의 바탕 위에서 전개하고 있다. 승,속을 막론하고 소박하나마 민족의식에 충만하였던 이들 고려후기의 신흥계층에 있어서 자국의 역사 속의 신이에 대하 이해와 인식이 거의 공통이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들은 이 신이한 사실들이야말로 자국의 역사를 전개시켜온 큰 추진력이었다고 인식하였음에 틀림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문신,무인을 막론하고 중기 이래 합리를 표방하면서도 폭압을 자행하며 혹은 일종 역사의 암흑을 초래하는, 그러면서도 고식과 경화 속에서 사회와는 유리된 독선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귀족정권에 대한 반발에서도 나왔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보다 더 외세의 제압에 대한 민족적인 저항의식의 소산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현실의 합리적인 물리력으로써는 당하기 어려운 강포한 외세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의식, 그 강렬한 극복의 의욕이 이들로 하여금 자국의 역사 속의 신이한 힘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케 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 김태도 - 역사 탐구 ㅡ,새로운 인식 ㅡ, 과연 혜안 이로소이다!!!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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