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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05---선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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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3 08:49 조회1,5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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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충렬공(휘方慶) 할아버지를 연구한 석사학위논문 3편이 발표된 바 있습니다. 그 중에서 충렬공 先系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분석된 다음 논문을 인용하여 봅니다.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석사학위논문, 1993, 전남대)

김방경은 최씨정권 아래에서 정치적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안동김씨 가문의 후광과 최씨정권의 비호, 그리고 군사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동김씨는 태조 왕건의 외손으로 출발하여 고려전기에 삼한공신을 배출하고 중앙의 고위직을 보유하였던 문벌귀족이었다.

그러나 이 가계는 무신란 등 혼란기에 처해 한때 안동지방으로 밀렸다.

이 가계가 다시 중앙으로 진출한 것은 최씨정권의 문신기용책에 의해서였다. 과거를 통해 김방경의 조부 ★敏成이 다시 중앙으로 진출하였고, 백부 ★金敞은 최우의 집권기에 재추를 지냈으며, 부 ★孝印은 상서에 이르렀다.

김방경은 안동김씨였는데 안동김씨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 (?-978)에게서 비롯되었다. 김부는 9명의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김방경 선대 가계도>에 보이는 것처럼, 이 중에 넷째 아들인 대안군 ★殷說은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소생으로 태조 왕건의 외손자였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1979 p136 고려평장사보국대안군김은열묘>

그는 관직이 공부시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아홉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 ★叔承이 공부시랑평장사로서 안동에 봉해짐으로써 안동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숙승의 아들 ★日兢은 삼한공신에 책봉되었고, 금자광록대부 상서우복야 태사대광의 지위에 올랐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중편 p1> 김방경의 시조는 태조 왕건의 외손자로서 또 삼한공신으로 재상의 반열에 올랐던 귀족이었던 것이다.

김방경 가계가 안동에서 거주하게 되었던 것은 日兢의 아들 ★利請때부터 였다. 이청은 상락군 안동태수로서 고령 즉 안동에 거주하였으며 :수적안동 자공시"<안동김씨대동보 권1> 라 한 것처럼 그로부터 안동이 본적지로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義和는 사호를 지냈다.
김방경의 선대는 이청과 의화 때 지방관으로 밀렸던 것이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무신란이 일어난 때와 비슷하다. 따라서 이 가계가 일시 지방으로 밀렸던 것이 무신란의 발생과 관계되지 않을까 추측된다.

의화의 아들 ★敏成이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직사관 겸 장야서승을 지냄으로써 이 가계는 다시 중앙에 진출하였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중편 p1, p202 김방경묘지>

그리고 민성의 두 아들도 과거에 급제하여 요직에 진출하였다. 큰 아들 ★敞(초명 孝恭, ?-1256 고종43)은 희종조에 등제하여 직사관 상서우승을 거쳐 수태사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에 올랐다. <고려사 열전 권15 김창전> 둘째아들 ★孝印 역시 희종때에 문과에 합격하였고, 이후 한림학사 병부상서를 지냈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김창 효인 형제가 요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최씨무인정권과 관계가 깊다. 이들은 ★최충헌의 집권기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최이가 정방을 설치하고 문신을 기용하는 정책을 취했을 때, 김창은 중용되었다.

★김창은 ★최이에게 중용되어 정방에서 전주를 담당하였고, 권문에서 오래동안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승진이 가능할 정도였던 것이다.

또한 이규보나 조충 등 최씨집권기에 재추를 지냈던 인물들도 김창과 같은 해 과거에 합격한 동년이었다. 김창의 지위는 막강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고종때 기거사인을 지냈던 이?이나 최이의 문객으로 권력이 막강했던 유천우는 김창에 의해 추천되어 성장한 인물이었다. <남인국, 최씨정권하 문신지위의 변화, 대구사학22, p102-104, 1983,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9, 새문사, 1987> 김창은 최씨정권과 밀착하여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김창의 동생 ★孝印도 ★최항의 치하에서 고시관을 지냈다. 그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글씨를 잘 썼고 또 한림학사에 이르렀던 것은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의 학문적 능력이 탁월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병부상서에 이르른 것은 형과 더불어 최씨정권에 밀착되어 발탁되었던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최씨정권은 왜 이들 형제를 발탁하였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이들이 한미한 가문에 속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5>. 이 같은 지적은 이 가계가 안동지방으로 밀려났던 처지에 있었던 점에서 타당하다.

이와 더불어 형제가 최씨정권에 발탁된 이유로 이 가계가 안동으로 밀려나기 이전에 삼한공신으로 누대의 문벌귀족이었던 점도 고려된다. 최씨정권은 일시 지방으로 밀려나 당대는 한미하지만 그러나 그에 앞서 누대의 문벌귀족이었던 안동김씨 인물을 다시 기용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敞과 孝印은 최씨를 하늘이 내린 존재로 인정하여 적극 충성을 다하였다. 물론 金敞같은 공신의 후예가 최씨정권을 지지하였던 것은 최씨정권의 안정유지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金方慶의 선대는 신라 왕족의 후예이며 고려 왕실의 외척으로서 출발하였고, 또 삼한공신의 후예로서 재상의 반열에 올랐던 가문이었다. 무신란을 전후한 시기에 이 가계는 지방으로 밀려 났으나 무인집권기에 다시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하였다.

이어 최충헌 집권때 등제한 金敞, 孝印 형제가 최우집권때 크게 중용됨으로써 이 가계는 다시 크게 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선대의 후광에 힘입어 이 가계는 번창하여 갔다. 金敞은 후사가 없었고, 동생 孝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세 아들은 고위직에 올랐는데 金方慶은 바로 孝印의 큰 아들이었다. 둘째아들 之慶은 밀직부사에 이르렀고, 셋째아들 玄慶은 좌정승에까지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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