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06---출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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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3 16:30 조회1,524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휘方慶) 께서는 16세때인 1227년(고종14) 5대조부 일긍(日兢)의 음보로 ♠양온사 동정으로 벼슬길에 나아간 후, 33세때인 1246년(고종31)까지 ♠대정, ♠태자부 견룡, ♠산원 겸 식목녹사, ♠서북면 병마녹사, ♠별장, ♠낭장, ♠감찰어사 등 젊은 시절에는 주로 무반직을 역임하셨습니다.
이때에 문하시중 최종준이 공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모든 일을 예로써 대우하고 중대한 일이 있으면 모두 公(=김방경)에게 맡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기억해둘만 합니다.
▣ 김방경 행장 (1350, 안진 跋)
나이 16세가 되어 삼한공신 태사대광을 지낸 선조 ♠日兢의 蔭補로 양온사 同正에 선임되었다가, 다시 隊正이 된지 얼마 안되어, 태자부 牽龍을 거쳐서, 散員에 배명되고 식목綠事를 겸하게 되니 軍國의 중한 임무를 동료들이 다 양보하게 되었다.
그때 문하시중 ♠최종준이 공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모든 일을 예로써 대우하고 중대한 일이 있으면 모두 公에게 맡기니 이때부터 그 명예가 세상에 뛰어나, 외직으로 나가서는 서북면 병마綠事가 되고,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別將이 되었다가
다시 郎將 監察御使로 전임하여 우창을 감독하는데, 아무 청탁도 듣지 않으니 어떤 대상이 권신에게 가서 참소하되 "지금 어사는 전 어사처럼 봉공하지 못한다" 고 하자, 이때 마침 공이 이르르니 권신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가?" 고 하니,
공이 대답하여 가로되 " 전 어사와 같이 봉공할려고 하면 나도 또한 능히 할 수 있으나 다만 나의 중요한 근본요강은 국고를 채우는 데 있을 뿐이요 모든 사람들의 입과 귀는 다 충족시킬 수는 없다" 고 하니
그 참소하던 자가 크게 부끄럽게 여기고 권신도 또한 부끄러워 안색이 변하였다. 그때 공은 令旨대로 이를 다하고 돌아가니 국고가 만적하게 되었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방경에게 맡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어떠한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재상이 권신(權臣-권이)에게 고소하여 이르기를 “이번 어사는 먼저 번 어사처럼 공무를 돌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김방경이 왔으므로 권신이 꾸짖으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먼저 번 어사처럼 일하려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나 나는 국가 창고의 저축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고소한 자가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며 권신 역시 얼굴 색이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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