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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07---출사2 (강화도 온수리, 정족산 전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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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3 16:31 조회1,5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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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는 36세부터 48세까지 1247∼1259년(고종34∼46)에 ♠견룡행수, ♠유섭장군 겸 급사중, ♠어사중승, ♠대장군, ♠지합문형부사, ♠금오위대장군 등 무반의 고위직을 지내셨습니다.

1231년 몽고가 침입하자 고려 조정은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여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강화도는 고려의 임시수도가 됩니다. 충렬공께서도 서북면 병마녹사, 서북면 병마판관을 지내실 때를 제외하고는 주로 내직에 근무하셨으므로 이때에 강화도에 거주하시면서 관직생활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강화도 길상면 온수3리 (강남중학교 앞 마을)에는 충렬공께서 한 때 사시던 곳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강화사(江華史)>에 의하면 "고려 고종때 도원수(都元帥) 김방경(金方慶)께서 한 때 이곳에 살았다 하여 원수리(元帥里)라 하였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온수리(溫水里)>로 된 것이며, 그가 살던 집의 현판을 해령당(海寧堂)이라고 한 것이 와전되어 해랑당이라 했다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수리는 전등사가 자리잡은 정족산 자락 아래 옛 포구 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전등사에는 충렬왕비 정화궁주의 원찰이 있었고, 정족산과 전등사는 충렬공께서 사시던 마을 뒷산에 있으므로 자주 오르셨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김방경 묘지명 (1300, 이진 撰)

공은 천성이 충직하고 근면하시며 공손하시고 검소하시며 신의있고 후덕하시며 과묵하고 엄숙하시며, 비록 무관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관리로서의 재간이 능하시어 將軍으로서 給事中을 겸하시고 혹은 御史中丞을 겸하시고 혹은 金吾衛大將軍으로서 知閤門事와 또 知御史臺事를 지내시고 또 御史臺事를 지내시고 臺閣을 역임하면서 아침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게을리하지 않으시고 매사를 결단함에 있어 神明하고 늠름하고 엄숙한 기풍이 있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였다.
혹은 백성들의 원에 따라 서북지방을 여러번 진압하시고 은혜와 위엄을 병용하여 그 지방의 民謠는 지금까지도 공을 사모하고 있다.


▣ 김방경 행장 (1350, 안진 跋)

이내 벼슬이 견룡행수를 대수하자 이때에 금위 관료들이 모두 권문세가에만 아부하고 내직은 게을리하니 공이 이르기를 "臣子의 의리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고 하고 동료인 朴모와 더불어 相約하고 내직에서 근무하는데 비록 질환이 있어도 휴가를 얻지 아니하였다.
그때 직려가 비좁아서 禁中의 관료들이 모두 밖에서 자는데, 그 근방에 한 창녀가 있었으니 그 자색이 뛰어난지라 朴이 누차 끌어낼려고 하였으나 고이 거절하니 朴이 부끄러워하며 잘못을 사과하였다.
이어서 禁中으로 천직되어 유섭將軍 겸 給事中 御使中丞으로 지명되어 臺閣에 출입하니 그 위풍과 곧은 절개가 조야에 용동하였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이 서울에 들어와서 견룡 행수(牽龍行首-의장병의 지휘관)로 되었는데 당시에 금위(禁衛-왕궁을 지키는 관원들)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권세 있는 집안에 가서 붙어 지내기 때문에 왕궁 수비는 아주 해이되어 있었다. 김방경은 이러한 일을 대단히 분하게 생각하고 앓는 때에도 휴가를 달라고 요청하지를 아니 하였다.
또 숙직하는 처소가 비좁아서 수비병들이 모두 밖에서 자고 있었으며 그의 동료로 박(朴)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가 한번은 기생 하나를 데려 오려고 하였으므로 김방경이 굳이 이것을 말리었더니 박도 무안해하면서 사과한 일이 있었다.
어사 중승의 벼슬을 하게 되자 법률을 고수하였고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았으며 그의 기풍과 절개가 항상 늠연(凜然)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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