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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1---최종준, 최종자-최온-최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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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4 00:08 조회1,8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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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역 고려사 제9책 (1998, 초판3쇄, 사회과학원 고전연구실 편찬, 신서원 발행)

최선의 아들은 최종원(崔宗源), ★최종준(崔宗峻), ★최종자(崔宗梓), 최종번(崔宗蕃)이다.

최종원은 검교태자첨사로 있었고, 최종자는 좌복야를 지냈으며 최종자의 아들은 ★최온(崔*昷 *어질 온)이다. 최종번은 승선으로 있었는데 그의 아들은 최평(崔坪)이었다.

★최종준은 신종 4년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고종 때에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좌승선으로 되었다. 옛날 제도에는 국자감은 매년 4철의 끝 달에 여섯 번(즉 5일에 한 번씩) 지정한 날에 사족의 자제들을 소집하여 론어와 효경으로 시험을 보고 합격한 자를 리부에 보고하면 리부에서는 다시 그들의 세계(世系)를 상고하여 초사(初仕)를 주기로 되었었다. 그런데 최종준이 자기 아들을 시험에 보내려 하니 국자정록이 지정한 시험날짜가 아니라 하여 듣지 않았는데 최종준이 최우(崔瑀)에게 청탁하고 시험을 받게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의 행위를 조소하였다.

좌산기 상시 지문하성사를 력임하고 문하 시중까지 올랐다. 29년에 퇴직하기를 청하니 왕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최 시중은 시종 한결같이 절개를 지켰으며 청렴하게 국가에 복무하여 왔다. 근래 국가에 사고가 많고 의론이 분분하였으나 림기 응변으로 적절한 결단을 내렸으며 국도를 옮기고 왕실을 보위한 공로가 비할 바 없거늘 어찌 상례(常例)를 지킨다 하여 갑자기 은퇴를 허락하겠느냐” 라고 하고 안석과 지팽이(几杖)를 주어 우대하였다. 그는 33년(1246년)에 죽었다. 그는 위인이 엄숙하고 무게가 있으며 말이 적었다. 그러나 가무(歌舞)와 녀색(女色)을 즐겼으며 거처와 음식이 지나치게 사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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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온의 아들은 ★최문본(崔文本), 최문립(崔文立)인데 최문립은 삼사사 벼슬을 지냈다.
최문본은 문음으로 산정도감으로 임명되었다가 견룡행수로 임명되고 벼슬이 여러번 올라 친종장군으로 되었으며 충렬왕 초년에 승선으로 임명되었다. ----- 2년(1276년)에 밀직부사 판도판서 벼슬에 있다가 죽으니 나이 44세 이었고 아들은 없었다.
최문본은 몸집이 크고 성질이 점잖으며 무게가 있고 행동이 구차하지 않아서 대신의 체통이 있었다. 일찍이 중국 사신이 와서 그를 보고 어떤 사람에게 묻기를 “귀국에 이런 인물이 몇 사람이나 있는가?” 라고 하였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방경에게 맡겼다.



▣ 고려시대 기록문화 연구 (2002, 남권희, 청주고인쇄박물관)
▣ 허흥식(1991) [1302년 아미타불복장의 조사연구], 온양민속박물관 9-46쪽
▣ 허흥식(1994) [한국중세불교사연구], 서울 일조각 212-247

<1302년 아미타불 腹藏 發願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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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5. 墨書 發願文
淸信戒弟子高麗國永嘉郡夫人金氏
金敏成 / 金孝印 / 宋氏夫人 / 宋耆 / ★崔文本 / 上洛公金氏 / 朴氏夫人 / ★崔*昷*어질 온 / 田氏夫人
靈駕等願承
阿彌陀佛慈悲之力頓脫無明超到樂方見
佛聞法速得解脫還及一切弟子與一切含靈俱霑利樂臨命終時移障碍承
佛神力往生淨域速成妙果還入塵勞廣度群迷謹誌

청신계제자고려국 영가군부인김씨
김민성 / 김효인 / 송씨부인 / 송기 / ★최문본 / 상락공김씨 / 박씨부인 / ★최온 / 전씨부인
영가등원승
아미타불자비지역돈탈무명초도락방견
불문법속득해탈환급일절제자여일절함영구점리락임명종시이장○승
불신력왕생정역속성묘과환입진로광도군미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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