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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제3회 여름캠프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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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4-07-24 09:08 조회1,5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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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제3회 여름캠프 퀴즈

1. 신라 마지막 임금님은 경순대왕이십니다. 이분의 넷째 아드님의 휘자는 은열(殷說)이십니다.
이분의 둘째 아드님이 우리 가문의 시조 할아버지이십니다. 이분의 휘자는 무슨 자를 쓰시는지요?

①휘 숙승(叔承)
②휘 일긍(日兢)
③휘 이청(利請)
④휘 의화(義和)
⑤휘 민성(敏成)
⑥휘 효인(孝印)

2. 상서공(휘 효인) 할아버지께서는 아드님 3분을 두셨습니다.
이 3분 중 첫째 할아버지가 바로 우리 가문의 중시조이신 상락군 개국공이십니다.
이분의 휘자는?
<힌트> 충렬공

①휘 현경(玄慶)
②휘 지경(之慶)
③휘 방경(方慶)

3. 중시조 충렬공의 현손(손자의 손자)은 모두 21분이십니다.
이분들 중 15분이 현재 우리 가문의 파조할아버지들이십니다.
그러면 우리 가문은 모두 몇 개 파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①21개 파
②15개 파
③13개 파
④11개 파

4. 이번 여름캠프 답사지는 15분의 파조 할아버지 중 두 분의 후손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다음 중 두 분 파조 할아버님의 휘자를 올바로 짝지은 것은?

①휘 사렴 / 휘 익달
②휘 칠우 / 휘 칠림
③휘 칠양 / 휘 성목
④휘 천순 / 휘 구용
⑤휘 구덕 / 휘 구정
⑥휘 유    / 휘 장
⑦휘 사형 / 휘 수
⑧휘 철    / 휘 달

<힌트> - 충렬공 현손
◆휘 칠우(七祐) - 밀직사사공파     ◆휘 칠림(七霖) - 개성윤공파
◆휘 칠양(七陽) - 군사공파           ◆휘 성목(成牧) - 전서공파
◆휘 천순(天順) - 부사공파           ◆휘 구용(九容) - 문온공파
◆휘 제안(齊顔) - 사천김씨           ◆휘 구덕(九德) - 안정공파
◆휘 구정(九鼎) - 도평의공파        ◆휘 윤(潤)     - 청주김씨
◆휘 유(儒)     - 대호군공파          ◆휘 익달(益達) - 제학공파
◆휘 장(塲)     - 판삼사공파          ◆휘 사겸(士謙) - 무후
◆휘 사렴(士廉) - 안렴사공파        ◆휘 사안(士安) - 무후
◆휘 사형(士衡) - 익원공파           ◆휘 수(綏)     - 서운관정공파
◆휘 길(吉)     - 무후                   ◆휘 철(哲)     - 정의공파
◆휘 달(達)     - 대구김씨

5. 임진왜란 3대 대첩은 임진왜란 당시 우리 나라에 쳐들어온 왜적을 크게 무찌른 일을 가리킵니다.
다음 중 임진왜란 3대 대첩에 속하지 않는 것은?

①진주대첩
②한산대첩
③행주대첩
④연기대첩

◆진주대첩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조선군과 왜군 사이에 벌어졌던 두 차례의 큰 싸움.
제1차 진주싸움은 1592년(선조 25) 10월 5일,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가 지휘하는 왜군 약 2만 명이 진주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이끄는 3800명의 조선군이 역공을 펼쳐 6일간의 대접전 끝에 왜군을 패주시켰다.
이 싸움에서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의 응원이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 싸움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지역을 보존하였을 뿐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엿보지 못하게 하였다.
제1차 진주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大捷)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제2차 진주싸움은 제1차 진주싸움의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명령을 내리면서 비롯되었다. 19일 3만 7,000여 명의 병력이 진주성 공격을 시작, 22일부터 본격적인 싸움이 전개되었다. 치열한 격전 끝에 의병장 김준민(金俊民) 등이 전사하였고, 29일 성이 함락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은 남강(南江)에 투신하였으며 민·관·군은 모두 학살당하였고 가축도 도살되었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 최대의 격전으로서 우리 민족의 애국정신을 발휘한 싸움이었다. 정평구(鄭平九)가 만들었다는 비거(飛車)를 사용한 것과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죽음으로 유명하다.

◆연기대첩
연기대첩은 고려 충렬왕때의 원나라의 반란군이었던 합단적이 고려로 쳐들어와 온 강토를 유린하다가 1291년(충렬왕 17년) 5월 1일 이곳 연기 정화산에 침입한 것을 격퇴시킨 연기지역에는 역사상 그 유례가 없었던 대승첩이었다. 적의 침입에 고려와 원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5월 2일 동이 틀 무렵 정화산을 공격하였으나 적이 너무 강력하게 저항하여 우리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에 김흔 장군은 "후퇴하는 자는 엄히 참하리라" 하고 앞장 서 적의 예봉을 꺾고 진격하여 적을 크게 격퇴시켰다.
정화산 전투에서 패주한 합단적은 남북으로 도주하였다가 5월 8일 전열을 재정비하여 연주산으로 다시 침략해 왔다. 연주산 전투에서는 한희유 장군이 앞장 서 적을 공격하여 격퇴함으로써 전후 2년여에 걸친 합단의 침입이 종식을 고하였다.
이처럼 연기대첩은 합단적의 유린을 종식시킨 결정적 승전이었음에도 후대에 이 대첩을 기념할 어떤 유적도 남겨 놓지 못하였음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 연기대첩에 참여했던 김흔 장군은 안동김문의 중시조인 충렬공 김방경의 둘째 아들로 비록 장군의 직계 후손들이 연기지역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연기대첩지의 역사성을 기리고 아울러 방계의 조상을 기리는 깊은 뜻으로 이 비를 새겨 멀리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 1997년 5월 안동김씨 연기종친회

◆합단(哈丹)의 침입
1290년(충렬왕 16) 원나라의 합단(哈丹)이 고려를 침입한 사건.
원나라의 반군(叛軍) 내안(乃顔)의 부장이었던 그는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나라 장수 내만대(乃蠻帶)에게 패하자 방향을 바꾸어 고려의 동북변을 침입하였다.
고려는 중군만호(中軍萬戶) 정수기(鄭守琪), 좌군만호 박지량(朴之亮), 우군만호 김흔(金忻)으로 하여금 각각 금기산동(禁忌山洞)ㆍ이천현계(伊川縣界)ㆍ권가현계(拳縣界)를 지키도록 하는 한편, 원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합단의 무리는 원나라의 쌍성(雙城)을 점령하고 고려의 등주(登州:안변)를 함락하였으며, 이듬해 철령(鐵嶺)을 넘어 교주도(交州道)의 양근(楊根)을 점령하였다.
이에 왕은 강화로 피란하는 한편으로 원주별초(原州別抄) 소속의 원충갑(元沖甲)이 원주에 들어온 적을 물리쳤다. 원나라도 1만의 군사를 보내 고려를 도왔다.
원주에서 패한 합단의 무리들은 계속 남하하여, 주력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들은 다시 연기에 집결하였다가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의 급습으로 대패하였다.
그들의 기병부대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으나 한희유(韓希愈)의 추격으로 합단과 아들 노적(老的)은 2,000여 기를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이로써 1년 6개월 동안 합단의 침입은 끝나고 9월 왕은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6. 진주성 싸움에서 대첩을 거두신 할아버지의 휘자와 시호를 올바로 연결한 것은?

①충무공 - 김시민
②충무공 - 이순신
③충장공 - 권율
④상락군 - 김흔
⑤충무공 - 김응하

7. 충무공은 무인 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시호입니다.
여러분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 가문에는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으신 분이 또 한 분 계십니다.
이 할아버지의 휘자는?

①휘 응해(應海)
②휘 치(緻)
③휘 응하(應河)
④휘 득신(得臣)

◆김응하(金應河)1580(선조13)∼1619(광해군11)
자는 경의(景義), 철원군 어운면 갈원동 하갈리에서 안동김씨인 아버지 김지사(金地四)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나, 14세에 전염병으로 양친을 잃고 동생 응해(鷹海)와 함께 자라면서 사냥을 즐겨 맨손과 단검으로 범과 돼지를 잡았다고 한다.
키가 8척에 힘이 세어 장사로 알려졌다. 1604년(선조37) 25세에 무과(武科)에 급제, 말직에서 전전하다가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의 추천으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가 1608년 박승종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자 그의 비장(裨將)으로 기용되었다. 31세 때 선천 군수를 하면서 청렴하게 백성을 다스렸다. 1610년 다시 선전관, 이어 경원판관(慶源判官)ㆍ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ㆍ삼수군수(三水郡守)ㆍ북우후(北虞候)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 10년(1618)에 만주에서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침범하자 명에서는 건주위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군을 청하였다. 김응하는 이때 명나라 원군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 휘하에 들어갔다.
이듬해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3월 명나라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명나라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부차령(富 車嶺)에서 패전하여 자결하자 조선군(朝鮮軍)은 6만의 적군과 대전케 되었다.
그런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우영장 이일원(李一元)은 달아났고, 김응하는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군분투 끝에 전사하고, 휘하 군사는 괴멸했다.
1620년(광해군12) 명나라 신종(神宗)에 의해 요동백(遼東伯)으로 추봉(追封)됨과 동시에 처자에게는 은(銀)이 하사되었고 조선에서는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8. 이 할아버지께서는 고려의 충신으로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임금님께 바른 소리를 잘 하셨던 분이십니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태조(이성계)가 수차례 높은 벼슬로 기용하고자 했으나 고려의 충신으로서 조선의 새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청주로 물러나 숨어 사셨습니다.
이 할아버지의 휘자는?

①판사공    - 휘 사겸
②안렴사공 - 휘 사렴
③관찰사공 - 휘 사안
④익원공    - 휘 사형

◆안렴사공(휘 사렴)
고려의 충신. 명장 충렬공(휘 방경)의 현손(玄孫).
문장에 능하며 공민왕 초엽 문과(文科)에 급제, 정몽주(鄭夢周)ㆍ이색(李穡)과 함께 직간(直諫)으로 이름을 떨쳤다. 1365년(공민왕 14) 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ㆍ집현전 대학사(壁上三韓三重大匡集 賢殿大學士)를 더하고 공신호를 내리자 신돈이 위험 인물임을 상소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청주(淸州)에 은퇴, 태조에 의해 수차에 걸쳐 좌사간(左司諫)에 기용되었으나 거절한 후 도산(陶山)에 가서 살았다.

◆충렬공(휘 방경) → 3子 문영공(휘 순) → 4子 정간공(휘 영후) → 1子 상락군(휘 천) → 1子 판사공(휘 사겸), 2子 안렴사공(휘 사렴), 3子 충강공(휘 사안), 4子 익원공(휘 사형)

9. 제학공 할아버지께서는 고려 우왕 때인 1380년 문과에 급제하신 뒤 보문각 직제학을 역임하셨습니다. 이 할아버지께서는 휘 익달 외에 또 다른 휘자를 쓰셨습니다. 다음 중 올바른 것은?

①문숙공 - 휘 영돈(永暾)
②상락백 - 휘 진(縝)
③제학공 - 휘 익달(益達)
④제학공 - 휘 익위(益偉)

◆제학공(提學公)
1380년(고려 우왕 6년. 41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순대부 밀직사좌부대언(正順大夫密直司左副代言)을 거쳐 보문각 직제학ㆍ지공조사사(寶文閣直提學知工曹司事)에 오름.
묘는 실전(失傳)이며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도정사에 설단(設壇)함.

◆충렬공(휘 방경) → 3子 문영공(휘 순) → 1子 문숙공(휘 영돈) → 子 상락백(휘 진) → 子 제학공(휘 익달)

10. 주회 종친 추가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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