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2---수리관개사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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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4 15:56 조회1,567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휘方慶)께서는 37세때인 1248년(고종35)에 서북면병마판관으로 계시면서 몽고의 잦은 침입으로 해도나 산성으로 피해 들어가 사는 정책을 펼 때에 청천강 하구에 있는 위도(평안도 정주) 라는 섬에 들어가 방파제를 쌓고 개간을 하고 저수지를 만들어 지방민의 식량과 식수를 자체 해결하신 바 있습니다.
아래 기록은 우리나라 간척사업, 수리관개사업의 역사를 논할 때 기록상 첫머리에 언급되는 매우 의미있는 기록으로 충렬공(휘方慶) 할아버지의 큰 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김방경 행장 (1350, 안진 발)
정미년(1247)에 공은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승진되었다. 그 때에 몽고병이 침공해 들어오니 공은 여러 성주에게 명령하여 "위도(지금의 정주)에 들어가서 잘 보전하라" 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섬은 넓이가 10여리로서 조수가 자주 드나들어 농경을 할 수가 없어 공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게 하니 그 위는 수레가 능히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 안을 개간시켜 씨를 뿌려 농사를 짓게 하니 당시 백성들이 고생을 하다가 가을이 되니 만곡이 무르익었다.
그러나 한편 몽고병들이 계속 주둔하고 물러가지 않았다. 섬 사람들은 그 곡식으로 먹고 살 수는 있었으나 또 한편 그 섬에는 우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육지까지 식수를 길러 갔다가 왕왕 몽고병들에게 포로가 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공은 다시 뚝을 견고하게 쌓아서 조수가 드나드는 것을 막고 비가 올 때에 물을 가두어서 큰 저수지를 만드니 여름에는 그 물을 길러다 먹고 겨울에는 얼음을 뚫고 물을 쓸 수 있게 하니 이로부터 육지까지 물을 길러가는 노고와 몽고병들에게 붙들려가는 걱정이 없어졌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그 후에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 판관(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군이 침공해 왔으므로 여러 성(城-고을)들에서 위도(葦島)에 들어가서 관청을 유지하고 인민들을 보호하게 되었다. 이 섬에는 평탄한 땅으로서 경작할 만한 곳이 10여 리 가량 있었으나 조수물이 밀려 들어오곤 하였기 때문에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방경이 방파제(防波堤)를 쌓고 파종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처음에는 이것을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가을에 이르러 곡식이 잘 되었으므로 그 덕택에 살아 나갈 수가 있었다. 또 섬에는 우물이나 샘이 없어서 항상 육지에 나가서 물을 길어 왔는데 때때로 물 길러 나간 사람들이 붙잡혀 갔었다. 그래서 김방경이 비가 오면 그 물을 저축하게 하여 못을 만들었으므로 그러한 근심이 드디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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