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3---수리관개사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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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4 15:57 조회1,433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 께서는 37세때인 1248년 서북면병마사로서 청천강 하구 위도(평안도 정주)에서의 간척사업 이외에도 1256년 강화도 간척사업, (1274-1281년)밀양의 수산제, 1279년 제천의 의림지, 전북의 눌제 수리사업을 하신 것으로 기록이 남아 전하고 있습니다.
충렬공 할아버지의 수리 간척 관련 행적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몽고병을 피해 해도나 산성으로 입보책을 쓸 때 목민관으로서 지방민의 자체 식량조달을 목적으로 한 경우로, 1248년 서북면병마사로서 위도에서의 방파제 건설 및 농지개간, 저수지를 만들었고,
둘째는 내직으로 들어와 강화도에서 계시는 동안에 1256년 제포와 와포를 방축하여 좌둔전이, 이포와 초포를 방축하여 우둔전이 설치되었습니다.
셋째는 일본원정 준비등 군대를 지휘하면서 자체 군량조달을 목적으로 수리시설을 개축한 경우로 (1274-1281년)밀양의 수산제 개축, 1279년 제천의 의림지 개축, 그리고 전북의 눌제를 개축하였다는 기록 등이 있습니다.
1) 1256년 강화도 간척
◆고려사절요
병진 43년(1256), 송 보우 4년ㆍ몽고 헌종 6년
○ 2월에 -----
○ 제(制)하기를, "여러 도가 병란을 입어 피폐되어서 조부(租賦)가 감소하였으니, 각 고을의 기인(其人)을 시켜서 노는 땅을 경작하게 하여 조를 거두어 경비를 보충하고, 또 문무관 삼품 이하 권무 이상을 시켜 각각 차등 있게 인부를 내어서 제포(梯浦)와 와포(瓦浦)를 방축하여 좌둔전(左屯田)을 만들고, 이포(狸浦)와 초포(草浦)를 방축하여 우둔전(右屯田)을 만들도록 하라." 했다. 국초에 각 고을 향리의 자제를 뽑아서 서울에 인질(人質)로 하게 하고, 그것을 '기인(其人)'이라 하였다.
2) 1279년 제천의 의림지 개축
의림지의 규모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제방의 길이 530척으로 400결의 논에 물을 댈 수 있다 하였고, 현재도 물의 깊이가 12㎡나 되는 것으로 미루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1279년(충렬왕 5) ★김방경(金方慶)이, 세종조에는 정인지(鄭麟趾)가 개축하였고, 1919년에는 지방인사 이종진(李鐘震)의 발기로 대개축이 거듭되어 현재도 훌륭한 용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1274-1281년) 밀양의 수산제 개축
◆신증동국여지승람 第26卷
密陽都護府 수산제(守山提): 수산현에 있다. 둘레가 20리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김방경(金方慶)이 뚝을 쌓아서 밭에 물대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량(軍糧)을 갖추었다."한다. 못가운데에 죽도(竹島)가 있는데, 세모마름.연. 마름, 귀리가 보이는 끝까지 가득하다.
4) 전북 고부 눌제 개축
◆[새천년을 여는 전북] 2000년 봄호>
○水利의 고장 - 전라북도 (문경민, 새전북신문 정치부장)
간척사업은 고려시대 병마판관 ★김방경(金方慶)이라는 이에 의해 ♠강화도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고려사절요> 그는 강화도 뿐 아니라 ♠정주, ♠밀양 등 전국 곳곳에서 간척사업과 수리시설을 정비하고 다녀 제방축조 토목기술 전문가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전북 고부의 ♠눌제도 그가 개축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지>에 전해온다. ---世傳高麗時金方慶因舊修築---
○눌제
<◆동국여지지> 고부군 산천조에는 ---눌제호는 군의 8리 서쪽에 위치하며 율호(律湖)라고도 한다. 둑의 길이가 1,200보에 이르며 주변이 40리에 이른다. 김제 벽골제 다음으로 큰 호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읍시 고부면 관청리에서 줄포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가 고부 눌제의 옛 둑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의 해발고도 25m의 구릉을 가로질러서 오늘날의 고부천 상류를 막은 것이다.
눌제 역시 벽골제와 비슷한 시기인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축조연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벽골제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광대 사학과의 나종우 교수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본 고부의 역사적 변천>이라는 논문에서 눌제는 애초 저수지의 제방이 아니라 방조제로서의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다. 즉 눌제가 벽골제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으며 그 시기는 대략 3세기 후반까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눌제는 고려시대 ★김방경이 개축했으며 조선초에는 民田으로 용도가 변경됐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부군 고적조(古跡條)에 있다. 세종 즉위 당시만 해도 눌제는 1만여결의 농경지를 몽리구역 내에 두고 있었다. <세종실록, ---古阜訥堤下可耕萬餘結---) -----
☞ KBS1TV 역사스페셜 홈페이지 (http://www.kbs.co.kr/history/)에서 2001년 06월 30일 방영된 <120개의 대제방, 강화 평야는 바다였다.>를 보면 강화도 간척사업에 대한 자세한 대본과 동영상을 검색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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