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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5---몽고와 講和, 개경還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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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5 09:44 조회1,4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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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1993, 전남대)

최씨정권이 붕괴한 후 김방경은 開京 出排別監, 進奉使 入元 등으로 개경환도와 친몽정책의 추진에 참여하였다. 이러는 과정에서 그는 重房이나 최씨 이후의 실력자인 ★金俊과도 대립하여 갔다.

김방경은 무인 집권자와는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였다. 고려의 몽고와의 강화 성공은 최씨정권 아래 항몽하였던 김방경 같은 무인이 왕과 문신 등의 講和派에 속함으로써 가능하였던 것이다.

백부 ★창이 타계하고 최씨정권이 무너진 뒤인 1260년 (원종1) 그는 49세의 나이로 개경 환도를 위해 ★太孫에 의해 출배별감에 임명되었다. 1263년 (원종4) 52세때 그는 어사중승, 지어사대사 겸 선군별감사를 지냈고. 이어 1265년 54세로 원나라에 진봉사로서 처음 입원하였다. 이어 그는 무반 최고위인 上將軍으로 승진하였다.

1268년 57세때 그는 응양상장군 ★전분의 무고(←첫번째 무고)로 남경으로 폄출되었다. 그러나 3일 만에 다시 복직하여 판례빈성사, 북계병마사, 서북면병마사, 형부상서, 추밀원부사로 승진하였다.


2. 몽고 강화 및 원종복위 활동

1258년 (고종45) ★김준 등에 의해 ★최의가 제거됨으로써 최씨정권은 붕괴되었다. <고려사 세가 권24 고종45년12월조>

항몽을 주도하던 최씨정권이 몰락함으로써 대몽책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듬해 고려는 몽고와 강화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준을 집정으로 하는 무인정권이 다시 대두되면서 무신들과 삼별초 같은 군대를 중심으로 항몽책이 다시금 대두되었다. 반면 ★이장용으로 대표되는 문신들과 몽고와의 외교교섭에 참여했던 관리들의 대부분은 화평책을 추진하였다. <민현구, 몽고군·김방경·삼별초, P95-97>

이와 같이 몽고와의 강화에는 왕과 문신 등 강화파의 주장이 작용한 것으로 그간 알려졌다. 그렇다면 무신으로서 김방경은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다음 사료를 보자

太孫이 옛 서울로 돌아가 도읍하기 위해 大將軍 김방경과 將軍 김승준 등을 출배별감으로 삼아 창고의 쌀 6천 4백 20곡을 내어 여러 왕씨와 백관에게 나누어 주고 집을 건축하는 비용을 돕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원종원년3월>

을축6년 (1265, 원종6) 봄 정월에 광평공 순과 大將軍 김방경, 중서사인 장일을 몽고에 보내어 은혜에 사례하고 방물을 바쳤다. <고려사절요 원종6년1월>

개경으로 천도를 추진하는 왕실의 ★太孫(심, 뒤의 ★충렬왕) 에 의해 김방경은 출배별감으로 임명되어 환도 준비를 담당하였고, 또 원나라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봉물을 바치기 위해 進奉使로서 元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김방경이 몽고와의 강화의 뜻을 가지고 왕실의 편에 서 있었던 데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것은 ★최의를 살해하고 강화파의 선두에 섰던 신의군 영도낭장 ★박희실이 원에 사신으로 갔던 것과 성격을 같이 한 것으로 생각된다.>


몽고와의 강화에는 김방경 같은 무신도 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방경은 개경환도 정책을 수행함으로써 무인정권과는 어떠한 관계가 되었을까?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되자 어떤 일이 있어서 중방(重房)의 장교 한 명을 곤장으로 치게 하였더니 이때에 반주(班主)로 있었던 전분이 김방경의 처사를 미워하여 권신에게 고소하여 김방경을 강직시켜 남경(南京-지금의 서울) 유수로 보내게 하였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김방경이 上將軍이 된 것은 元나라에서 돌아온 1265년 (원종6) 후반이었다. 그는 이때 공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重房 반주인 ★전분의 미움을 사서 권신에게 폄출당하였다. 이때 김방경을 폄출한 권신의 당시의 실력자 ★金俊이었다.

김방경은 김준, 전분 등의 무인 실권자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김방경은 이미 그들과는 정치적 입장을 달리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그가 왕, 문신들과 더불어 개경환도 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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