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6---무고사건1 (1268년, 5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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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5 13:43 조회1,469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께서는 <고려사> 기록상 4번의 무고사건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세력다툼이었던 셈인데요,
첫 번째는 1268년 (원종9, 57세) ★전분의 무고로 남경(한양)으로 좌천되었다가 3일만에 복직되었습니다. 이는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김준 등 무신정권과의 세력다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삼별초의 난 진압중 1270년 (원종11, 59세) ★홍찬, ★홍기의 무고로 삭탈관작되었다가 다시 上將軍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몽고 장수 아해와의 싸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1278년 (충렬왕5, 67세) ★위득유, ★노진의, ★김복대 등에 의한 무고사건으로 홍다구에 의한 심한 고문을 당하고 대청도에 유배되었다가 원나라에 들어가서 해명하고 돌아오셨습니다. 이는 홍다구 등 부원배 세력 (원나라에 빌붙어 권력을 행사하던 세력) 및 충렬왕 측근세력과의 권력투쟁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 번째는 1282년 2월에 홀치가 죽판궁(竹坂宮)에서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을때, 저물어서 왕이 남문에 나아갔는데, 중찬 ★김방경이 취하여 말을 타고 지나가니, 곧 명하여 순마소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놓아 주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충렬왕비 측근 부원세력 및 충렬왕 측근세력과의 권력투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충렬공 무고사건1 (1268년, 57세)
▣ 김방경 행장 (1350, 안진 발)
이때를 당하여 국가가 바야흐로 ▲서북지방이 크게 위태하여 걱정되므로 북방을 진무하자면 반드시 덕망이 있는 사람을 선택해야만 되기 때문에 公으로써 이에 당하게 하니 여러 성의 백성들이 사랑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마침 모상을 당하여 고향에 가셨다가 돌아와서
얼마 안 돼서 ♠上將軍이 되어서 법으로써 ▲重房(당시에 행정전반을 감독하던 기관을 都房이라 하고, 군부를 감독하던 기관을 重房이라 하였음)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조문도교위 응양상장군 ★전분 (원나라 장군)이 公의 좌하에 있음을 질투하여 감히 항거하고 권신에게 무고하여 公이 ▲남경으로 좌천되었으니 이 때가 바로 지원5년 (1268) 戊辰 2월이었다.
그때에 우승선 ★朴琪가 대조(원나라 조정)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북방 40여성을 두루 거쳐 왔는데 그곳 백성들의 연명장에 의하면 "만약에 다시 公을 얻게 된다면 우리들은 안거낙업을 하여 전심으로 나라를 도울 것이다." 고 진정하였다.
이래서 公은 ▲남경(지금의 서울)에서 사흘을 지난 후에 ♠판례빈성사로 승진되고 다시 ♠서북면 병마사가 되어 ♠형부상서 ♠추밀원부사로 들어갔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되자 어떤 일이 있어서 ▲중방(重房)의 장교 한 명을 곤장으로 치게 하였더니 이때에 반주(班主)로 있었던 ★전분이 김방경의 처사를 미워하여 권신에게 고소하여 김방경을 강직시켜 ▲남경(南京-지금의 서울) 유수로 보내게 하였다.
김방경이 일찍이 ♠서북면(西北面) 병마사로 있었을 때 그 지방 사람들에게 좋은 정치를 하여 인심을 얻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북면의 여러 고을들에서 왕에게 글을 올려 김방경으로 하여금 다시 와서 진무(鎭撫)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방경이 남경으로 부임한 지 겨우 사흘만에 왕은 그에게 다시 서북면을 진무하는 일을 맡아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후 중앙 정부에 들어와서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로 되었다.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1993, 전남대)
몽고와의 강화에는 김방경 같은 무신도 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방경은 개경환도 정책을 수행함으로써 무인정권과는 어떠한 관계가 되었을까?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되자 어떤 일이 있어서 중방(重房)의 장교 한 명을 곤장으로 치게 하였더니 이때에 반주(班主)로 있었던 전분이 김방경의 처사를 미워하여 권신에게 고소하여 김방경을 강직시켜 남경(南京-지금의 서울) 유수로 보내게 하였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김방경이 上將軍이 된 것은 元나라에서 돌아온 1265년 (원종6) 후반이었다. 그는 이때 공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重房 반주인 ★전분의 미움을 사서 권신에게 폄출당하였다. 이때 김방경을 폄출한 권신의 당시의 실력자 ★金俊이었다.
김방경은 김준, 전분 등의 무인 실권자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김방경은 이미 그들과는 정치적 입장을 달리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그가 왕, 문신들과 더불어 개경환도 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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