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9---무고사건3 (1276년 익명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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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5 13:55 조회1,582회 댓글0건본문
정족산 전등사는 충렬공의 집터가 있었다고 전해오는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 해령당 바로 뒷산이고, 1259년에 가궐을 지었고, 별궁이 있었으며 충렬공과 교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충렬왕비 정화궁주의 원찰이므로 밝혀진 기록은 없지만 충렬공께서도 많은 왕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곳입니다.
고려사에 기록된 1276년 12월 김방경 무고사건에 정화궁주도 연루되어 있어 참고로 고려사 기록도 첨부하여 봅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 12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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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디어 ★김방경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그 해 가을에 ★김방경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원나라로 갔는데 황제는 문지기를 시켜서 빨리 들어오라고 독촉하고 ★김방경을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자기의 음식을 걷어서 ★김방경에게 주었으며 또 금으로 장식한 말 안장과 채단(綵緞)으로 만든 옷과 금, 은을 주었는바 이러한 총애와 우대는 다른 사람이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귀국하게 되자 황제는 그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주었다.
■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1273년 5월, 최후의 일본 초유사 趙良弼이 귀국함으로써 쿠빌라이는 일본의 의사를 거듭 확인했다. 쿠빌라이는 제주도의 三別抄를 평정한 뒤 開京으로 개선한 장수들을 元(몽골)의 大都(北京)에 소집, 회의를 열고 일본 정벌을 명했다.
원정군의 지휘부는 ♥都(흔도)·洪茶丘(홍다구)·劉復亨(유복형) 및 고려의 장수 ★金方慶의 4인으로 구성되었다. 총사령관은 ♥都. 홍다구와 유복형은 右副元帥와 左副元帥였다. 고려군을 이끄는 ★金方慶에게는 丞相(승상) 다음의 지위인 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라는 작위가 수여되었다. 개부의동삼사라면 일찍이 신라·백제·고구려 임금들이 隋·唐의 황제로부터 받은 작위이다.
★金方慶은 황제로부터 『拔群(발군)의 戰功을 바란다』는 격려와 金製 안장과 綵服(채복: 비단옷)을 받고 귀국했지만, 그 마음을 결코 밝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대해 병사 8000명, 뱃사공·水夫 1만5000명을 차출하도록 명했기 때문이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 ?1276년
김방경이 귀국하게 되니 ★왕은 서울(개성) 성 밖에 나가서 그를 출영하였다. ★흔도가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황제께서는 나로 하여금 몽고 군을 관할하게 하고 그대로 하여금 고려 군을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그대는 매양 일이 있을 때마다 국왕에게 미루고 국왕은 또 그대에게 밀어 버리니 과연 누가 고려 군의 관할을 맡아야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출정시에는 장군이 관할하는 것이고 평화시에는 국왕의 관할을 받는 것이니 본래 법이 그렇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자 새 새끼가 그들이 앉은 집 뜨락에 와서 있었는데 흔도는 사람을 시켜서 그것을 잡으라고 하여 얼마 동안 가지고 희롱하다가 죽여 버렸다. 그리고 김방경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소?”라고 물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농부들이 힘써 농사를 지어 두면 이것들이 와락 달려들어 곡물을 다 쪼아 먹어 버리니 당신이 그것을 죽인 것은 역시 백성들을 가긍히 여기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흔도가 말하기를 “내가 보건대 고려 사람들은 모두 글도 알고 불교를 믿는 것이 한족들과 유사한데 매양 우리들을 멸시하면서 ‘몽고 사람들은 그저 살육하는 것을 일삼으니 하늘이 반드시 그들을 미워할 것이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에게 살육하는 풍속을 준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하는 데 불과하니 하늘은 그것을 죄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몽고 사람들에게 굴복하게 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공주가 원나라에 공장(工匠)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여 건축 공사를 대규모로 일으키려고 하였는데 목장 제령(木匠提領) ★노인수(盧仁秀)가 큰 나무 한 개를 골라 내어 가지고 암시하는 방법으로 충고하려고 김방경, ★유경(柳璥)과 ★인후(印候), ★장순용(張舜龍)더러 각각 톱을 가지고 나무의 두 끝을 자르게 하고는 “신하로 된 자들은 응당 이와 같이 임금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하여야 하는 법이다”라고 말하였다.
김방경이 일찍이 ★왕과 ★공주를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여 대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 사용한 은그릇들은 모두 새로 주조하여 만든 것이었는데 연회가 끝난 다음에 그것들을 내탕(內帑-국왕의 창고)에다 바치었으며, 또 ▲보제사(普濟寺)에다 5백 나한당(五百羅漢堂)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낙성식 때에 큰 술잔치 모임을 열었는데 달로화적과 양부(兩府-첨의부와 밀직사의 대신들)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였으며 서울 안의 인사들과 부녀자들이 일시에 모두 모였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를 조소하였다.
■ 1276년
또 어떤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달로화적 ★석말천구(石抹天衢)에게 투서를 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제안공 ★왕숙(齊安公淑)과 김방경 등 43명이 반역을 음모하고 다시 강화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석말 천구가 왕숙과 김방경 등을 가두어 놓고 재상들을 시켜 연합 심문하게 하였는데 ★유경이 그들의 무죄를 역설하여 구원해 주었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유경(柳璥)의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제28권 - 세가 제28 > 충렬왕 1 >
충렬왕 병자 2년(1276)
12월
병자일에 밤에 어떤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는 투서를 하기를
“●정화(貞和) 궁주가 공주를 저주하였다”고 무고하였으며 또 “제안공 왕숙과 ★김방경 등 43명이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정화 궁주 및 왕숙, ★김방경 등을 잡아 가두니 ●유경(柳璥)이 울면서 충성껏 간언하였으므로 공주가 느끼고 깨달은 바 있어 모두 석방하여 주었다.
갑신일에 장군 고천백 및 홀날대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황제에게 글을 보내기를
“공주를 저주하였다는 말이 근거도 없이 생겨났는데 당신이 명백히 살피면 그것을 잘 알게 될 것이다. 이번에 달로화적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투서를 가지고 와서 보이면서 40여 명이 모여서 다시 강화도로 들어갈 것을 음모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만일 그 밀고가 진실로 근거가 있을진대 당당히 낯을 내놓고 고발할 것이거늘 하필 이름을 숨기고 가만히 투서하였겠는가? 이것은 반드시 나라에 불감이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원한을 품은 자가 허망하게 꾸며서 밀고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기록된 40명 가운데는 사망한 지 벌써 5년이 지난 자도 있은즉 이것으로 보아도 무고이며 망발이라는 것을 증명할 만하다. 당신은 명철한 판단을 내려 금후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투서는 모두 다 논하지 않게 하여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제105권 - 열전 제18 >
유경
〔유승(柳陞), 유돈(柳墩), 유만수(柳曼殊)의 기사 첨부〕
유경의 자(字)는 천년(天年)이고 또 하나의 자는 장지(藏之)인데 정당문학 유공권(公權)의 손자로서 고종 때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여러 관직들을 역임하여 국자감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유경은 오랫동안 정방(政房)이 있었는데 유천우(兪千遇)와 함께 최항(崔沆)이 후대하는 인물로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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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달로화적 석말 천구(石抹天衢)의 숙소에 무명의 투서를 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정화 궁주(貞和宮主)가 왕의 총애를 잃게 되니 여자 무당을 시켜서 공주를 저주하도록 하였으며 또 제안공 왕숙(齊安公淑)과 중찬 ★김방경 및 이창경(李昌慶), 이분희(李汾禧), 박항(朴恒), 이분성(李汾成) 등 43명이 반역하여 다시 강화도에 들어가려고 음모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주는 ●정화 궁주를 잡아 가두고 석말 천구 역시 왕숙, ★김방경 등을 체포하였고 곧 재상들을 불러서 합석 문초케 하였다. 석말 천구가 갑자기 말하기를
“봄철이 벌써 가까워 왔으니 여러분은 봄맞이 시를 짓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는데 김구는 다만 예! 예 할 뿐이었다. 유경이 개연히 말하기를
“왕비와 수상이 모두 감옥에 갇히어 있는데 지금이 어찌 시를 읊조리고 있을 때인가?”라고 하였더니 석말 천구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석말 천구가 또 공주에게 암시해서 여러 죄수들을 친히 문초하도록 하니 공주가 그의 말을 따르려고 하였다. 유경이 여러 재상들과 함께 공주를 뵙자고 청하고 무릎을 꿇은 채로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근년에 권력 있는 신하들이 나라의 명맥을 틀어잡고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고발하는 일이 생기면 그것의 사실 여부와 경중 여부를 물어 보지도 않고 즉시 죽이는 것이 마치도 풀베기라도 하는 듯이 쉽사리 해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어서 목숨을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하늘이 도와서 이런 무리들을 모두 없애 치웠고 또 공주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와서 다스리게 하였으므로 저희들은 다시는 이전과 같은 화단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러한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새로 얻었다는 그 무명의 투서에 대해서는 제가 그 시비를 가려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인물들이 그전처럼 똑똑하지를 못하고 관군(몽고군)이 사방에 주둔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달아나겠습니까? 또 이름도 밝히지 않은 글에 어찌 믿음성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것을 믿고 죄를 준다면 저희들 가운데 한두 사람도 내일에는 또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굳이 힘을 다하여 왕실의 일을 돌보겠습니까? ●정화 궁주가 공주를 저주하였다는 것 역시 쉽게 판명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공주께서 우리 임금에게 시집 온 후 나라 사람들이 안심하고 모두 황제의 은덕에 감사하여 뼈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는 터인데 그가 만약 사적 감정으로 공주를 저주하였다손 치더라도 신이 영검이 있다면 은덕을 배반한 화가 반드시 자기의 몸에 도로 내려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유경이 말하던 시초부터 눈물, 콧물이 섞이어 흘러내리고 그 말이 아주 절절하였기 때문에 부근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쏟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주가 느끼고 깨달은 바 있어서 모두 다 석방시키고 ●정화 궁주만을 남겨 두었다. 재상들이 그를 놓아 줄 것을 요청하자고들 의논하였으나 공주를 무서워하여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윽고 유경이 벌떡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서 역설한 결과 공주가 그제야 궁주를 놓아 주었다. 이에 왕이 내인(內人)을 보내 유경에게 아주 감사의 말을 전달하게 하였다.
또 위득유(韋得儒), 노진의(盧進義)란 자들이 ★김방경 등이 반역 음모를 한다고 무고한 일이 있었다. 원수 흔도가 왕과 공주에게 말하여 ★김방경을 고문하자고 요청하였으므로 왕이 장차 그것을 허락할 모양이었다. 이때 유경이 나아가 말하기를
“저는 변방 구석진 곳에서 나고 생장하여 아직 귀국의 제도가 어떠한지를 모릅니다마는 우리 나라의 법에서는 먼저 고발한 자를 잡아 가두고 다음에 피고를 잡아들이어 왕에게 말씀드린 후에야 문초하며 고발한 것이 사실이라면 고발한 자에게 상을 주며 거짓이라면 그만한 죄를 제가 도로 당합니다.
그런데 지금 고발한 자는 잡아 오지도 않고 당장 피고를 고문하려 하니 이치가 그렇게 되어서 쓰겠습니까?”라고 하니 흔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 사실에 관해서는 ★김방경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 전등사 (전등사 간행)
전등사의 기원
고구려 소수림왕11년인 서기 381년에 ●아도화상이 眞宗寺를 창건함으로써 전등사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뒤 고려고종46년인 서기 1259년에 삼랑성에 가궐을 짓게 했으며, 원종5년인 서기 1264년에는 대불정오성도량을 넉달동안 연다.
전등사에 관한 기록이 사서에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266년부터로 고려원종7년인 1266년에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등사를 역사적인 가람으로 새롭게 일으킨 인물은 고려 충렬왕비 ●貞和宮主이다. 고려 25대왕인 충렬왕이 세자로 있을 때 정비로 맞이한 여인이다. 그러나 충렬왕은 원나라에 가 있는 동안 강요에 의해서 원나라 세조(쿠빌아이)의 딸인 제국공주와 다시 결혼을 한다.
충렬왕을 사이에 두고 정화궁주와 제국공주는 서로 반목한다. 뒷날 정화궁주는 충렬왕의 사랑을 잃고서 저주를 보내고 있다는 투서 때문에 감금되기도 한다. 사랑을 잃은 여인의 아픔을 안고 별궁에서 외롭게 지낸다. 살아서 다시는 충렬왕과 만나지 못한 정화궁주는 전등사에 와서 아픈 마음을 달래면서 고려의 국운이 다시 강건해지기를 기원한다. 충렬왕의 사랑을 잃은 것은 단순히 여인으로서의 질투가 아니라 속국의 왕비로서 겪는 설움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전등사는 정화궁주의 願刹로서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고려왕실의 보호를 받는 사찰로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전등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고려말의 학자 목은 ●이색이 남긴 시이다.
나막신 신고 산에 오르니 흥은 절로 맑고,
전등사 노승은 나의 행차 인도하네.
창 밖의 먼산은 하늘 끝에 벌였고,
樓 밑에 부는 바람 물결치고 일어나네.
세월 속의 역사는 (사람인변)吾太史가 까마득한데,
구름과 연기는 삼랑성에 가득하다.
정화궁주의 願幢을 뉘라서 고쳐 세우리,
壁記에 쌓인 먼지 마음을 상하게 하네.
전등사의 대조루에 올라서 지었다는 이 시 속에 정화궁주의 원찰이었던 전등사의 기록이 남아 있다.
절 이름이 바뀐 것도 이 무렵이다. 정화궁주가 玉燈을 불전에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절 이름을 진종사에서 전등사로 바꾼다.
달리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경덕전등록" 때문에 전등사라고 칭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정화궁주는 승려 ●印奇에게 바다 건너 송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인쇄해 오도록 한다. 송나라 대장경에는 경덕전등록을 비롯한 중국의 불전들이다. 경덕전등록이 포함된 대장경을 보장하게 된 사찰이라는 뜻에서 또한 진종사보다 전등사라는 이름이 굳어져 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海史 임승익이 지은 "대조루중건모연문"에서는 육조의 衣鉢(의발)을 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라고 하였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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