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여름캠프 답사자료집 2---증평 남하리 죽리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07-26 16:17 조회1,860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파 600년 세거지
(증평 남하리 죽리 용강리 일원)
1. 서령공(휘 自荊) 설단
좌랑공(김식)과 상산부인 진천송씨와의 사이에 2남으로 태어났다. 서령을 지냈다.
湜(식)의 둘째아들이며 안렴사공의 손자인 自荊(자형)은 임종에 임하여 그 자손에게 이르기를 "충효 두 글자는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遺命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안렴사공 할아버님의 유지를 받들어, 너희들은 앞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지 말며 조상들께서 이루어 놓으신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고 하였다.
이에 그 자손들 역시 유지를 받들어, 自荊(자형)도 자기 분묘를 평총으로 하도록 일렀고, 그 때문에 지금도 묘소를 알 길이 없다. 묘는 진천군 문백면에 있었다고 하나 실전하여 지금은 증평읍 남하리에 있는 삼보산에 설단하여 향사를 올리고 있다.
배위는 동래정씨이다. 후손이 1,600여 세대에 이르는데, 증평 일원(남하리, 죽리, 용강리), 음성 원남면 마송리 등지에 많이 세거하고 있다.
2. 삼보산(三寶山) 해발 273m
죽리초등학교에서 서남쪽으로 약 1km쯤 떨어진 거리에 우뚝 솟아있는 산이 바로 삼보산(三寶山 : 해발 273m)이다. 지금의 삼보산은 대동여지도에는 삼보봉으로 표기돼 있으며 이 산에서 3가지의 보물이 난다하여 이같이 불려 진다고 한다(천연약수, 금광석, 산골).
첫째 보배는 초정리의 천연약수, 남하리의 탄산약수로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력이 있다하여 복용하거나 여름철에 약수 목욕을 하는 사람이 많다.
둘째로 삼보산에는 금광석이 매장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산은 안동 김씨의 종산으로 안동 김씨 조상들의 묘소가 있어 채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로 이 산에서 나오는 '산골'이라는 광물질인데 북일면 호명리에서 나는 이 산골은 뼈가 골절됐을 때 접골재나 풍치의 통증이 있을때 담배에 섞어서 피운다고 한다.
예로부터 우리 고장의 풍속은 상검색(尙儉嗇 : 검소하고 인색한 것을 숭상하다)을 본으로 하여 근검 절약하는 인심 좋은 충 · 효 ·열을 가훈으로 한 많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낸 고장으로 이 전통을 이어 가도록 선현들이 붙인 슬기가 함축된 산이다.
3. 경모재(敬慕齋) (1660, 죽헌공파<김규> 재실)
증평읍에서 율리행 도로로 약 4km 지점 남하리1구 양지촌에서 삼보산을 향하여 약 500m 올라간 서당말이라는 마을이 있다. 약 320년전에 건립하였다고 하는 옛날 기와집으로서 안동김씨 재실이라 칭하나 전에는 이곳에 살고 있는 안동김씨 문중의 서당으로 쓰였다 하여 부락 이름이 서당말이라 하는 것도 이 건물 때문이라 한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신축한 것이다.
이곳이 서당으로 사용시 안동김씨 중에 두 형제가 경모재에서 공부를 하는데 어느 늦은 가을에 스님 한분이 와서 하룻밤 자고 가자고 청하였다. 이를 허락하여 쉬는데 때마침 스님이 병이 나서 앓고 있으므로 형제는 밥을 지어 해 주고 약을 구하여 치료를 하는 등 온갖 정성을 드린 결과 이듬해 봄에 소생한 스님이 하는 말이, 두 분의 은혜가 큰데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승이 약간의 지리를 아오니 두분의 뫼자리를 알려드릴까 하오니 허락해 달라고 하여 승낙을 하자 이어 스님은 두분의 소원을 물으니 형은 자손이 많기를 원하고, 동생은 부자되기를 원하니 스님이 원대로 해주겠다며 묘자리를 잡아 주었는데 스님 말대로 형은 7형제를 두고 아우는 3형제를 두었다. 지금도 형의 자손은 많고 아우의 자손은 적은 반면 부자가 많아 현재에도 형제의 자손이 수백호 살고 있다.
4. 금반마을 내력비 (1992년 건립)
고려충신 안렴사 김사렴 공의 후손들이 이 부락에서 조선조 초기부터 살아온 안동김씨 세거지이고 타성도 같이 살고 있으며 인물이 많이 난 고장이다.
삼강실록 (충효열에 대한 정부표창자 명부)에 실려있는 효자효부가 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분은 안동김씨 김환극씨와 그의 처 광산김씨였다. -----
이 부락의 인물을 열거하면 청안사마소 (생원 진사가 모여서 공부하던 곳)에 배향된 학자로서는 생원 김명용씨, 김주씨, 김보씨, 김구석씨가 계셨고, 진사로서는 고명하신 학자 김기필씨와 금부도사(경찰청 관리) 김오씨, 사복시정(군마를 관장한 관리) 김희석씨, 좌승지(청와대 비서관) 김여구씨, 호조참판(재무부차관) 이며 효자이신 김의로씨, 돈영부사(임금님의 종친들을 관장하던 부서의 관리)이며 효자이신 김환계씨와 열녀 김학수의 처 나주김씨가 계셨고, 청안향교 전교를 한 김흥연씨, 김영연씨와 일생동안 많은 후학들에게 한문을 가르쳐주신 공으로 교은불망비가 서 있고 청안향교 전교와 유도회장을 한 김사옥씨, 또 죽리국교 증평중학교 형석중학교 증평공고 설립을 주도, 단군전을 개축하고 증평엽연초생산조합내에 송덕비가 서 있으며 한국인물사에 오른 증평면장을 한 김봉연씨, 증평읍장을 한 김태경씨, 청주시 건설과장 및 미호천류역 개발사업소장을 한 김군연씨, 단양공고 교장과 충주시 교육장을 한 김재섭씨, 농지개량조합 도지회장을 한 김재국씨, 고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딴 김윤식씨가 있으며 효부로서는 김승연의 처 곡산연씨, 김태경의 처 곡산연씨, 김태주의 처 경주이씨, 정낙영의 처 전주이씨, 전희남의 처 광산김씨, 김정묵의 처 고령신씨, 김태규의 처 한산이씨가 있다.
우리 부락민은 모두가 자부와 긍지를 가지고 마을의 유대와 발전모습을 영구히 보전할 것이며 후세인이 본받아 배우고 익히게 하기 위하여 국가문화 시책에 따라 주민의 뜻을 모아 마을내력을 기록하여 이 비를 세우노라
서기 1992년 9월 14일 남하리 금반부락민 일동 수립
5. 竹里 마을 지켜주는 守護石
죽리마을은 위치상으로 남차리와 남하리 가운데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中里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마을이 형성된 유래를 보면 마을마다 전설이나 실물이 보전되어 있다. 이 마을도 구전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中里(竹里)마을은 삼보산에서 산줄기가 내려온 기슭에 마을을 이루었으나 마을을 감싸줄 좌청룡 우백호는 이루질 못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 전 안동김씨가 자리를 잡고 살면서 수호석을 세웠다.
좌청룡쪽은 남자를 상징하는 높이 2m정도에 길고 뾰족한 것을 세웠고, 우백호 쪽은 여자를 상징하는 1.5m정도에 둥글고 넓적한 모양을 세웠다. 마을의 편안함과 후손들의 번창을 위해서 하였다고 한다. 마을에서 협동하여 세웠다고 하는데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다.
몇년전 경지정리 사업을 하면서 좌청룡을 상징하는 수호석을 옮기던중 밑부분이 부러져서 높이가 낮아져 오늘에 이른다.
6. 院坪마을의 天祭祀
원평 마을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院집이 있던 마을이다. 院집은 관리들이 공무차 왕래하면서 숙식을 해결하던 국영여관으로 길손들이 많이 왕래하며 들리던 장소이다. 이 마을 입구에는 수령이 400∼500년 되는 버드나무 아래 祭壇(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병자호란 이후에 마을에 괴질이 만연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이에 마을에서는 방역이나 치료를 감당할 수도 없이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마을의 불안을 없애기 위하여 천제님께 고사를 올린 것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매년 정월 14일에 마을 고사를 드린 이후로는 질병이나 마을에 불행한 일이 없어 고사를 지냄으로 인한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천제사를 올리는 사람은 마을에서 당년에 생기복덕한 3명을 선정하여 고향재, 헌관, 축관을 정한다. 고향재는 제물을 장만하고 준비하는 사람이고, 헌관은 제를 올리는 사람, 축관은 축을 읽는 사람인데, 마을 사람들 중에서 미리 정하여 천제사를 올린다.
매년 낭독되는 제문은 안동김씨인 김근연 웃대 조부께서 제문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마을 사람들 개개인 성명을 적어서 축원을 올린다.
7. 기타 문중유적
□ 안동김씨사(安東金氏祠) (1805년 건립)
증평읍에서 율리행 도로로 약 4km 떨어진 남하리1구 양지촌에 있다. 이 근방에 대대로 내려오는 안동김씨가 살고 있는데 그의 선조중 金聲武(김성무), 金宏(김굉), 金羲錫(김희석), 金汝龜(김여귀), 金義路(김의로)의 다섯분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1805년 (순조5) 후손들이 건립하였는데 여러대가 거듭됨에 따라 위로부터 4위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현재는 호조참판을 지낸 김의로 위패만 모시고 그분의 효성심과 가정의 화목함을 본받고져 자손들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김의로(金義路) (1764-1848) : 자는 正甫(정보), 본관은 안동으로 고려 안렴사 오은 김사렴의 14세손이며 효자 김환극의 아버지이다.
□ 김환극부부 효비각 (金煥極夫婦 孝碑閣) (1958년 건립)
증평읍 남하1리 솔모루 마을에 효심이 지극한 김환극 (안동김씨)과 그의 처 광산김씨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비각.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맛배지붕 목조기와집이며 효비각 안에 있는 효비의 비문은 1958년에 성균관장 최찬익(崔燦翊)이 짓고 글씨는 괴산군수 이길원(李吉遠)이 썼다.
*김환극(金煥極) : 본관은 安東, 按簾使 金士廉의 14대손으로 증평읍 남하리에서 태어났다.
□ 한사정 (閑士亭) (1965년 건립)
증평읍에서 청안행 도로를 따라가다 삼거리에서 동쪽 율리행 도로를 따라가면 죽리 원평부락뒤 삼보산 기슭에 있다. 학식이 높은 선비 儉竹(검죽) 선생의 공덕을 추모하는 뜻으로 그 후손과 제자 중 김동휘, 김은수 등이 협력하여 1965년에 건립하였다. 현 토정의 건물은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2간, 측면2간의 팔작집이다.
*검죽 金好奭(김호석)은 안동김씨로 구한말 증평읍에서 태어나 학식과 덕망이 높아 이 지방의 고결한 선비로서 존경을 받았다. 공은 세상에서 명예와 부귀는 뜬구름과 같이 여겨 오직 학업을 연마하고 인격을 도야함에 힘씀으로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380여명에 달하였다.
□ 단군전(檀君殿)
증평읍 대동 1003-61에 있는 단군전은 관리에 김봉연, 김도연이 주도하였고, 김사달은 편액을 서하였다. 단군전 앞 마당에 세워져 있는 金箕錫 공적비는 1988년 건립위원장 김도연, 고문 김봉연, 이사 김재성 등이 주도하여 세운 것이다.
또한 증평읍 대동 증평 노인회관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삼일공원에는 1971년에 건립한 반공지사 위령비가 있는데, 조건상이 글을 짓고 김사달이 쓴 비문이다.
□ 청안 사마소(淸安 司馬所) 시도기념물 49호
사마소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즉 사마방(四馬榜)에 급제한 자가 50인 이상이 나온 읍에 설치되는데, 그 급제자들이 지방유림(地方儒林)으로서 뛰어난 인물이라 하여 후배와 후손들이 제사하며 유학을 강론하고 정치를 의논하는 곳이다.
청안향교 옆에 있는 청안사마소에는 백곡 김득신(제) 뿐만 아니라 증평 남하리 죽리 출신이신 김명룡, 김주, 김보, 김구석, 김흥보, 김기필, 김호철 등 우리 문중에서 8위 위패가 배향되어 있고, 현재 청안향교 장의는 인근 사리면 도화동에 살고 계신 金容斗(제)이다.
청안향교 입구에는 비가 여럿인데<유도회청안지부위원장장공성원기념비>는 전교 花山후인 金思玉 찬이고, <도유사연형존성비>는 유도회 청안지부장 金伯卿, 건립위원장 金道演이 세운 것이고, <대소인원과차자개하마비>는 증평농업협동조합장 金奉會가 세운 것이다. 그리고 이곳 청안향교 소장 고서 8권과 청안면사무소 소장 고서 6권에는 증평, 청안 일원 선조님 기록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2003년 5월부터 청안사마소는 괴산군청 주관으로 철거한후 신축하고 있다.
*金思玉(김사옥)은 당대 명필이었다 하는데, 1955년 안렴사공 신도비운 서문을 짓고, 1966년 안동 충렬공 묘역에 세운 묘비를 서하였다
*金鳳演(김봉연, 1905-1993)은 증평읍 남하리 (솔모루)에서 출생으로 1969년부터 안렴사공파종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증평엽연초생산조합 구내에 조합장 김봉연 송덕비(1972, 조합원 일동)가 있고, 1995년 4월 16일에는 증평문화원과 증평향토문화연구회 및 지역유지들이 뜻을 모아 송산교 옆 소공원에 김봉연 공적비를 세웠다.
*金道演(김도연)은 증평읍 용강리 출생으로 일찍이 漢學을 수학하고, 지역학교의 기성회장으로서 지역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각종 사회단체, 라이온스 크럽, 鄕校의 典校 등에서 크게 활약하여 봉사하였고, 1998년에는 문영공종회 회장에 취임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 변영득의 처 안동김씨 玉蓮의 節孝碑
절효부 변영득의 처 안동김씨 玉蓮(1881-1957, 안렴사 후, 남하리 생)의 節孝碑는 1978년 청원군 북이면 영하리 탑산에 세웠으며 비문은 성균관전교 상산 연규복이 짓고 글씨는 전일현이 썼다. 건립추진위원장 한충구 립 <비문집 청원의 인풍, 199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