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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26---진도 삼별초 진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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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6 22:04 조회1,4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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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조선 2003년 12월호

三別抄가 抗蒙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 까닭

1270년 6월3일 삼별초는 1000여 척의 선단을 끌고 전남 진도를 향해 서서히 南下(남하)했다. 강화도는 개경과 가까워 고려정부군을 지배下에 넣은 몽골군이 그 軍船을 동원하여 강화도 상륙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때 삼별초는 강화도에 있던 公私(공사)의 재화와 정부의 관리들이 섬에 남겨두었던 처자들을 인질로 삼아 배에 실었다. 처자들의 통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高麗史는 전하고 있다.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간 것은 동년 8월19일이었다. 서서히 남하하면서 서해 일대의 도서를 경략했기 때문이다. 元宗은 정부군에 명하여 삼별초를 추격했다. 추격군에는 몽골군 1000여 명도 가세했다. 그럼에도 정부군은 삼별초를 두려워하여 접근하지 못했다.

진도는 강화도처럼 육지와 가까우면서도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어 삼별초로선 절묘한 섬이었다. 당시 삼별초의 진도 점거에 대해 개경 측은 비명을 올렸다. 고려정부의 다급함은 그 무렵 元宗이 몽골에 보낸 國書에서 잘 나타나 있다.

『경상·전라의 貢賦(공부)는 모두 육지로 수송하지 못하고 반드시 水運으로 하는데, 지금 역적(삼별초)이 진도에 웅거한지라, 이곳은 水路의 咽喉(인후: 목구멍)로서 왕래해야 할 선박을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

삼별초는 진도에 들어간 뒤 龍藏城(용장성)을 쌓고 궁궐을 크게 조영하여 都城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진도를 수도로 한 삼별초의 활동은 매우 왕성했다. 이후 창선·거제·제주 등을 비롯하여 30여 개의 섬을 점령하여 해양왕국의 위세를 높였다.

삼별초의 활동은 육지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먼저 육지의 백성과 재화를 도서에 옮겨 항전력을 강화하는 한편 長興을 비롯하여 合浦(馬山)·金州(金海)는 물론 羅州·全州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남부 지방의 일부 수령방백들은 도망을 쳤고, 그들 중엔 溫王을 찾아와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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