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27---진도 삼별초 진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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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6 22:06 조회1,571회 댓글0건본문
■ 월간조선 2003년 12월호
民心은 어디로 움직였는가
1270년 9월, 元宗은 ★金方慶(★김방경)을 全羅道追討使(전라도추토사)로 삼아 전라도를 탈환했다. 이 작전엔 蒙將 아하이(阿海)도 가세했다. 그러나 삼별초의 세력은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전라도를 탈환했다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몽골 및 고려정부의 수탈에 당해 온 백성들은 삼별초의 난에 힘을 얻어 곳곳에서 반항하거나 반란을 일으켰다.
몽골은 처음부터 삼별초 난의 진압에 적극적이었다. 모처럼 元宗을 회유하여 고려를 그의 外藩(외번)으로 삼았던 정책에 차질을 빚을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世祖 쿠빌라이의 숙원인 일본 정벌 일정에 차질이 생겼던 것이다. 삼별초가 해상에서 항전을 계속하는 한 일본 정벌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동년 윤 11월 元宗은 ★金方慶에게 上將軍으로 기용, 삼별초 토벌을 명했다. ★金方慶은 동년 12월 진도 근해로 쳐들어가자 삼별초도 전선에 기치를 휘날리며 응전하니 蒙將 아하이가 겁을 내 물러나려 했다. ★金方慶의 고려군 戰船들만 진공했는데, 삼별초 戰船들의 역습을 받아 모두 도망쳤다. ★金方慶만 홀로 적선들 가운데로 돌입했다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삼별초와의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 연합군 측, 특히 몽골에서는 삼별초에 대한 회유공작을 거듭 전개했다. 이에 대한 삼별초의 지도부의 반응도 매우 전략적이었다. 예컨대 元宗 11년 12월, 蒙使 杜員外(두원외)와 함께 員外郞 박천주가 진도에 건너갔는데, 삼별초 지도부는 元宗의 諭旨(유지)에 대해서는 「惟命是從」(유명시종: 오로지 명에 따르겠다)이라는 화답을 했던 반면 몽사는 상대도 하지 않고 억류해 버렸다. 이것은 몽골과 고려정부의 사이를 벌려놓으려는 교묘한 이간책의 구사라고 할 수 있다.
元宗(1271) 12년 4월, 쿠빌라이는 전투에서 비겁 무능했던 阿海를 대신하여 屯田經略使(둔전경략사) 炘都(흔도)를 삼별초 토벌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증원군을 급파했다. 炘都가 지휘한 둔전군은 원래 일본 원정을 위한 부대였지만, 진도 공략을 위해 전용했던 것이다. 증원부대의 지휘관은 洪茶丘(홍다구)였다. 洪茶丘는 麟州(인주)의 鎭將 洪福原(홍복원)의 아들로 그의 아비와 함께 조국을 배반하고 쿠빌라이에게 붙어 몽골의 장군이 되었던 인물이다.
5월15일, 炘都와 洪茶丘가 이끈 몽골군은 ★金方慶이 지휘하는 고려군과 연합하여 진도를 공략하여 용장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 王溫은 洪茶丘에 붙들려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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