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29---진도 삼별초 진압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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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6 22:09 조회1,482회 댓글0건본문
■ 월간조선 2003년 12월호
裵仲孫의 최후
용장산성과 벽파진에서 물러나 읍내로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진도의 동쪽과 남쪽에 있는 抗蒙유적지를 답사할 차례다. 박명석 선생이 모는 지프를 타고 읍내 중심가를 벗어나자 곧 「논수골」이라는 마을이 보였다. 朴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삼별초의 왕(王溫)을 사로잡은 洪茶丘 등 蒙將들이 斬首(참수)할 것인지 여부에 대한 論難(논란)을 벌였다고 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논수골 바로 동쪽에 「王무덤」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洪茶丘에게 참수된 王溫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여기서 조금 동진하면 바닷가에 이르는데, 이곳에 금갑항이 있다. 금갑항은 金通精이 이끈 삼별초 패잔병이 제주도로 가기 위해 배를 탔던 곳이라고 한다. 금갑항은 진도에서 제주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의 항구로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行 뱃머리가 있었다고 한다. 요즘 제주도行 뱃머리는 금갑과 연육교로 이어진 接島(접도)로 옮겨졌다. 수심이 낮은 금갑항에는 대형선이 입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18번 국도로 진도의 남단(임회면 남동리)에 이르면 南桃城(남도성)이 버티고 있다. 이곳에서 裵仲孫이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 자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남도성 인근 굴포리 바닷가에는 裵仲孫 사당이 있다. 이 사당 안에는 裵仲孫과 삼별초 병사 및 지방 의병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朴선생에게 抗蒙전쟁 당시 진도 인구가 얼마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강화도에서 1000여 척의 배를 타고 왔다고 하니까 한 척의 승선인원을 10명으로만 잡아도 1만여 명, 여기에다 진도의 원주민과 삼별초 정부에 귀순해 온 사람 등을 더하면 3만 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삼별초의 패망 후 진도는 초토화했다. 그러면 그때 진도 사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
朴선생은 『高麗史의 기록에 1만여 명이 고려정부군에 붙잡혔고 또 몽골군도 많은 백성을 포획했다고 되어 있다. 그들 중 적어도 1만여 명은 合浦(합포: 지금의 馬山) 등지에서 日本 원정용 兵船을 짓거나 전국 각지에 산재한 몽골군의 屯田(둔전)에서 兵糧(병량)을 생산하는 노동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고려 말기에도 진도현은 왜구의 침탈이 극심해 空島化(공도화)했다가 조선왕조 世宗 때 復縣(복현)되었다. 현재 진도군의 인구는 약 4만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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