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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28---진도 삼별초 진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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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6 22:08 조회1,5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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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조선 2003년 12월호

珍島로 가는 길

필자는 진도를 답사하기 위해 지난 10월31일 오전 9시30분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 가보니 하루 1편만 있는 진도 직행 버스는 오후 3시35분 출발이었다. 모로 가도 진도에 가기만 하면 될 것 아니겠는가. 오전 9시35분 출발 광주행 버스에 탔다. 배낭 하나를 달랑 메고 혼자 떠나는 여행은 이처럼 홀가분해서 좋다.

오후 1시30분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하니 15분 뒤에 출발하는 진도行 직행버스와 바로 연결되었다. 해남군과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 아래가 바로 1597년 9월, 13척의 함대로 일본 함대 133척을 무찌른 명량대첩의 현장인 울돌목(명량해협)이다. 명량해협은 폭 1km 정도이지만, 간만의 격차가 10m이며 조류의 시속이 11.21노트에 달해 범선시대엔 진도로의 도항이 至難(지난)했을 것이다.

진도고등학교의 교사와 진도신문 발행인을 지낸 박명석씨와 만났다. 그가 모는 지프를 타고 龍藏山城(용장산성)과 南桃石城(남도석성)의 답사에 나섰다. 진도는 동-서와 남-북이 100리에 이르러 국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용장산성은 진도의 북단에 위치해 있다. 진도읍내 중심가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20리쯤 북상하다가 챙재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801번 지방도로로 좇蛔든다. 여기서 2.5km쯤 더 가면 용장산성이 나타난다. 둘레가 약 13km에 이르며 산성 안 왕궁터에는 계단 형상의 석축이 남아 있다.

여기까지 와서 碧波津(벽파진)에 가지 않을 수 없다. 벽파진은 연육교인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진도와 육지를 잇는 나루터였고, 삼별초를 공격했던 麗蒙 연합군도 이곳을 상륙지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명량전투 직전에 3도수군통제사 李舜臣의 함대가 本營을 설치했던 곳도 벽파진이었다. 용장산성에서 벽파진까지는 801번 지방도로를 따라 북진하면 10리도 되지 않는 거리다.

1271년 5월15일 麗蒙연합군은 左·右·中 3軍으로 나누어 세 방면으로 진공했다. 삼별초의 방어력을 분산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고려의 上將軍 ★金方慶과 蒙將 炘都가 中軍이었다. 삼별초는 그동안 연합군과 싸워 자주 이긴 결과로 輕敵(경적)하는 마음이 생겨 방비를 소홀히 한데다 몽골 측의 회유책에 걸려들어 방심하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연합군이 갑자기 쳐들어오니 삼별초는 연합군 측의 주력인 中軍을 막으려고 벽파진 부근으로 집결했다. 이때 左軍인 洪茶丘 부대가 급히 측면(獐項=노루목)을 공격하여 火攻을 가했다. 이에 놀란 삼별초의 방어진이 무너졌다. ★金方慶·炘都의 주력부대도 벽파진에 상륙하여 용장성을 포위했다.

당시 몽골군은 각종 攻城(공성)무기와 최신병기, 특히 火槍(화창)·火砲(화포)를 사용했다. 용장산성이 함락된 직후 삼별초의 지도자 裵仲孫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진도의 남단까지 퇴각,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金方慶은 패주하는 삼별초를 추격하여 남녀 1만여 명과 전함 수십 척, 糧米 4000석과 많은 財寶(재보)·器仗(기장)을 거두어 개경으로 이송했다. 몽골군은 많은 士女와 백성 및 珍寶(진보)를 포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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