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여름캠프 답사자료집 3---백곡 문학의 산실! 증평 율리 귀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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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7 13:15 조회1,532회 댓글0건본문
백곡 문학의 산실! 증평 율리 귀석산
1. 율리 좌구산(구석산)
남봉 김치(金緻 : 1577~1625)는 충남 병천면 백전리에서 괴산 능촌으로 이사해 살았다고 전하는데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차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에 자기의 관상을 보니 그해에 죽게 됐는지라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변성을 만나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과 사전에 내통해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대북파로 몰려 유배를 당했다.
광해군은 즉위한 후 정세변화에 따라서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과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등 학정을 일삼으므로 인헌황후(좌찬성 구사맹의 딸)의 아들인 종(倧, 인조 : 1595-1637)은 조정에 대북파와 견원지간인 서인 일파와 경기 · 충청지방의 관리들을 포섭해 반정을 일으킬 것을 모의한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기 전 어느 여름날 심기원이 그를 찾아와서 능양군(인조)의 사주를 봐 달라고 하기에 이곳 율리의 물치폭포에서 목욕한 후 소반에 보를 놓고 점을 쳐 보니 임금이 될 쾌인지라 이를 극비로 하고 반정을 일으킬 날을 잡아 주는데 천파일로 잡아주고 심기원의 심복이 될 것을 다짐한다.
그가 밀담을 마치고 오랜 노독으로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난데없이 한 밤중에 동편 산에서 개가 짓는 소리가 3번 들리므로 그는 잠에서 벌떡 일어나 "이 앞산이 무슨 산이냐?" 하고 물으니 그의 심복 하나가 대답하기를 "이 산은 거북이가 앉아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좌구산이라고 합니다"하니 점술을 연구해 천문에 밝고, 풍수에 조예가 있는 남봉 김치는 말하기를 "아니다 저곳에서 개가 3번 짖었으니 저 산은 좌구산이 틀림없다"하면서 "누가 염탐을 하러 오는 것이 틀림없으니, 이곳을 빨리 떠나자"하고 서둘러 모두 이곳을 떠나므로 난을 무사히 피했다고 한다.
그 후 인조는 1623년 3월 13일 밤에 이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등의 병력 700여명과 능양군이 이끄는 친병과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 700여명이 합세해 인조 반정을 성공시킨다.
김치는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다시 유배에서 풀려나 동래부사를 거쳐 1625년(인조3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됐으나 그 해에 학질(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그가 죽은 후 시신을 괴산 능촌(◀생부 시회1581몰 의 묘는 능촌에, 조부 충갑1575몰의 묘와 양부 시민1592몰 의 묘는 중원 살미 무릉동에 있었다.)으로 모시려했으나 상여가 이곳 율리재를 넘을 때 명정이 바람에 날려 현재의 그의 산소 자리에 앉으므로 그 곳에 안장했다고 그 후 후손들이 이 곳에 와서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가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닦으며 지낸 보천에서 율리에 이른 깊은 골짜기를 뜻하는 심곡을 그의 호로 정했을 가능성과 유배를 당할 때는 근처에, 산소의 우연성으로 미루어 이 곳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율리>
은자(隱者) 마을 봉천이는 봉씨(俸氏)마을 이루었고
좌구산 물치폭포 심곡따라 흐르는데
이산지고(離山地高) 불이던가 구석사(龜石寺)를 지어놓고
가모솥을 굽던 자리 솔점말이 되었구나.
큰 사람 머문 곳에 지명 이름 다양하고
미원장터 넘나들던 분저재길 큰 길 되고
밤티고개를 넘어가면 청천마을 이른다네
삼거리 머물면서 옛 추억을 더듬는다.
*밤고개 : 밤티 동쪽에서 청천으로 넘어 가는 큰 고개.
*분저재 : 삼거리 남쪽에서 청원군 미원으로 가는 고개.
*율리사지 : 1644년(인조22)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불입상.
*구석사(龜石寺) : 절골에 있는 조선조 초의 절로 청안현 남쪽 산이 높아 남향은 불이므로 불을 다스리는 것은 물, 물의 수족지신인 거북을 따서 구석사를 세웠다고 한다. 구석사는 지금은 폐찰 되고 당시 있던 탑신, 축대, 우물 등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2. 김치(1577-1625)
1) 호 남봉(南峰)·심곡(深谷)
남봉공(휘 치) 호는 남봉(南峰)·심곡(深谷)으로, 낙향하거나 유배갔을 때의 지명으로 볼 수 있다. 율리에 가전해 오기를,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가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닦으며 지낸 보천에서 율리에 이른 깊은 골짜기를 뜻하는 深谷을 그의 호로 정했을 가능성과 유배를 당했을 때 어떠한 연고가 있어 율리에 거주하였을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1625년 남봉공이 돌아가시자 이곳 율리에 장례를 모시게 된다. 1674년에는 아들인 柏谷 金得臣이 짓고 글씨는 손자 사위인 崔 渲이 써서 그의 묘소 앞에 묘갈을 세우고 있다.
2) 묘갈명을 통해 본 주요행적
◎만력(萬曆) 정축(丁丑;1577년) 7월7일에 공(公)을 낳았다. 공(公)은 태어나서 몸집이 크고 건장했으며 성품이 기특하고 매우 총민(聰敏)했다.
◀(편집자 주)
외조부(外祖父) 양언개(楊彦漑)이다. 1581년 5세때 생부(휘 시회, 1542-1581) 돌아가시고 괴산 능촌리에 묘소가 있다. 조부(휘 충갑, 1515-1575)의 묘는 중원군 살미면 무릉동에 있었다.
◎정유년(丁酉年(1597년))에 알성과(謁聖科)에 합격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에, 춘방설서(春坊說書)가 되었다. 사서(司書)로 승진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를 제수 받았으며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나아갔다. 해미(海美)와 흥덕(興德)의 원으로 나아갔는데,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베풀어 아전들을 온화(溫和)하게 하고 백성들을 품었다.
◀(편집자 주)
1604년에 김득신을 낳았다. 해미(海美) 또는 흥덕(興德)의 원으로 나아갔을 때인 듯하다. 처부(妻父) 목첨(睦詹)이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에 다시 옥당 미원(玉堂 薇垣)으로 들어와, 이조좌랑(吏曺佐郞)으로 전보(轉補)됐으며 겸(兼)하여 호당(湖堂)에 사가(賜暇)되었다. 기유년(己酉年: 1609년)에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제수 받았는데 렴직(廉直)으로 자신을 지켰으며(持身), 가혹한 정치를 크게 개혁하고 피폐(疲弊)해진 백성들을 이에 소생(蘇生)시켰으며, 성균사예종부사복정(成均司藝宗簿司僕正)를 지냈다.
◀(편집자 주)
제주도 제주시 오라2동(정실마을) 남쪽 오등동에 위치한 방선문은 제주10경의 하나인 영구춘화로 불리는 곳이다. 1609년(광해1년) 가을, 남봉공이 제주판관 재직시 방선문에 올라 지은 시로 절창으로 손꼽히며 방선문에 남아 있는 마애시 중에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된 것이다.
남봉집에는 없으나 제주에는 남봉공의 시 5수가 전하고 있고, <탐라지>(1653년(효종 4)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이 편찬)에도 남봉공의 시 3수와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가 실려 있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에 영남균전사정전역(嶺南均田使正田役)이 되었으며 병조참지사간원대사간이조참의(兵曺參知司諫院大司諫吏曺參議)으로 들어왔다. 을묘년(乙卯年: 1615년)에 양(養)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편집자 주)
양 아버지 충무공 김시민의 묘소는 중원군 살미면 무릉동 (현재 충주댐 수몰)에 있었다. 이때부터 3년간 시묘살이를 한 듯하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병형공참의승지(兵刑工參議承旨)에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편집자 주)
왕조실록에는 병조참지에 올랐으나 독직사건으로 파면되었다. 라고 되어 있다.
◎이 당시(當時), 광해군(光海君)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윤리를 어겨 대비(大妃)를 폐비(廢妃)한다는 논의를 일으켰다. 공(公)이 분격하면서 크게 말하기를 "시국이 좋지 않구나." 라고 하고 드디어 용호(龍湖)에 거처했다. 성시(城市)에 나아가지 않은 지가 6년이 되었으며,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편집자 주)
1618년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비 부터 1623년 인조반정때까지 용호에 거처한 듯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고,
◀(편집자 주)
왕조실록에는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沈器遠)과 사전에 내통하여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대북파(大北派)로 몰려 유배당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동래(東萊)에 왜를 접촉할 때 땅을 중히 여겨, 공(公)을 부사(府使)로 제수했다. 재주와 국량(局量)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폐비(廢妃)에 관한 일에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성을 상처 보듯이 했으며 대중들의 폐(弊)를 줄여주어 백성들이 돈으로 비(碑)를 세웠다. -----을축(乙丑)년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되었는데, 묵은 병이 다시 재발되어 5월 27일 안동객사(安東客舍)에서 졸(卒)했다. 연세가 49세인데 청안현 (淸安縣) 남쪽 율치(栗峙)에 장례(葬禮)지냈다.
◀(편집자 주)
율리에 가전해 오기를, 그가 죽은 후 시신을 괴산 능촌으로 모시려했으나 상여가 이곳 율리재를 넘을 때 명정이 바람에 날려 현재의 그의 산소 자리에 앉으므로 그 곳에 안장했다고 그 후 후손들이 이 곳에 와서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생부(김시회, 1581몰)의 묘는 괴산 능촌에, 조부(김충갑), 양부(김시민, 1592몰)의 묘는 살미 무릉동에 있었다.
◎정유(丁酉)년에 부인(夫人)이 병으로 임종(臨終)하여 공(公)의 묘(墓) 왼쪽에 장례(葬禮)지냈다. 공(公)은 기량(器量)이 깊고 침착하여 기뻐하고 노하는 빛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큰 지략이 출중 (出衆)하여, 재상인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가 공(公)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추천했다. 대개 당시의 논의에 따라 이조참판(吏曺參判) 사천 목첨(泗川 睦詹)의 딸을 배필로 맞았다.
<安興君 南峰 김치(1577~1625)의 묘갈은 顯宗15년(1674년) 증평읍 율리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 세웠는데 비문은 아들인 柏谷 金得臣이 짓고 글씨는 손자 사위인 崔 渲이 썼다.>
3. 김득신(1604-1684)
1) 호 백곡(栢谷)·귀석산인(龜石山人)
가전되어 오기를, 증평읍 내성동(현 삼성동) 또는 남하리 서당골(현재의 경모재)에 백곡이 어릴때 다닌 서당이 있었다고 하나, 어떤 연고인지는 알 수 없다. (외조부 목첨, 처부 김성발 *충암 김정의 4세손)
백곡 22세, 1625년 부(휘 치)의 묘소를 율리에 모시고 나서는 시묘살이를 비롯해서 증평 청안 일대에 주로 거주한 듯하다. 청안에서 좌구산 동쪽으로 청천가는 곳에 백곡(柏谷)이라는 옛 지명이 있음을 볼 때, 이때 백곡(栢谷)이라는 호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단 조부(휘 충갑)의 유배시 정착지인 병천 가전리에 백전(栢田, 그리고 김득신과 친교가 많았던 이득곤(1587-?)이 세운 식파정이 있는 곳에 백곡(栢谷)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식파정기를 지으면서 백곡노인(栢谷老人)이라는 호를 사용하고 있다.
좌구산을 귀석산이라고도 하고, 백곡이 율리에 거주하는 시기에 귀석사가 있었음을 볼때, 이때 귀석산인(龜石山人)이라는 호를 사용한 듯하다. 백곡집에 보면 율리, 죽리, 용강리 곡강, 청안을 오가며 지은 시가 많이 남아 있다.
좌구산 넘어 청안향교 옆 청안사마소에 위패가 배향되어 있고, 증평읍내에서 남하리 죽리 남차리 율리 가는 한적하고 시골 정취 물씬 풍기는 예쁜 도로가 <백곡로>로 명명되었다. 2002년 5월, 증평문화원 주관 백곡김득신기념사업회 추진으로 <백곡 김득신 학술 연구 발표회>, <백곡 기념 백일장 대회> 등이 열렸고, <청풍명월을 노래한 김득신의 시> 책자를 간행하였다.
2) 묘갈명을 통해 본 주요 행적
◎만력 갑진년(1604년) 10월 18일 생이라. 그 태어날 때 안흥군(安興君)이 꿈에 노자(老子)를 보았다. 그래서 어릴 때의 이름을 몽담(夢聃)이라 했다.
◀(편집자 주)
부(휘 치) : 1604년경 해미(海美) 또는 흥덕(興德)의 원으로 나아갔을 때인 듯하다. 부(휘 치)의 외조부(外祖父) 양언개(楊彦漑), 처부(妻父) 목첨(睦詹)이다. 즉 백곡(휘 득신)의 외조부는 목첨(睦詹)이다.
◎어릴 때 노둔(老鈍)하여 10세에 비로서 학교(學校)에 나갔다.
◀(편집자 주)
부(휘 치) : 계축년(癸丑年: 1613년)에 영남균전사정전역(嶺南均田使正田役)이 되었으며 병조참지사간원대사간이조참의(兵曺參知司諫院大司諫吏曺參議)으로 들어왔다. 을묘년(乙卯年: 1615년)에 양(養)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양 아버지 충무공 김시민(1592몰)의 묘소는 중원군 살미면 무릉동 (현재 충주댐 수몰)에 있었다. 이때부터 3년간 시묘살이를 한 듯하다.
◎서모(庶母)가 성격이 거스르는 점이 있었으나, 공(公)이 대접할 때 더욱 정성스럽게 하여 마침내 감화하셨다. 향선생(鄕先生)인 후천(朽淺) 황종해공(黃宗海公)이 공(公)을 매우 중히 여기고 어질다 여겼다. 상서(尙書)를 지낸 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이 소시적 안흥군(安興君)에게 배울 때 서로 사귀는데 지극히 즐거워했다.
◀(편집자 주)
향선생(鄕先生)인 후천(朽淺) 황종해공(黃宗海公)이 목천동약(木川洞約)을 열었고, 묘가 목천에 있는 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이 소시적 안흥군(安興君)에게 배울 때 서로 사귀었다 하는 점으로 보아, 어릴때 목천에 거주한 듯하다.
***황종해 : 17세기 중 · 후반에 입약되어 실시되기 시작한 황종해의 목천동약(木川洞約)은 여씨향약의 본문을 먼저 들고, 자기의견을 부속조목으로 기록한 동규범례(洞規凡例) 46조를 적고 있는데 우리나라 향약사상 중요한 사례이다.
***박장원(朴長遠) : 어사 박문수의 증조부, 천안 병천 가전리 인근 재실에 증손 박문수와 함께 영정이 있다. 1612(광해군 4)∼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 자는 중구(仲久), 호는 구당(久堂)·습천(#습08川). 직장(直長)을 지낸 훤(#훤08)의 아들이다. 1627년(인조 5)생원이 되고 -----저서로는 《구당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을유년(乙酉年:1625년) 정안흥군(丁安興君)의 상을 당했다. 상을 마친(服 )후에 문장이 더욱 발전하여 선배들이 무릎을 꿇었으며 영화로운 명성이 크게 떨쳤다. -----책상자를 짊어지고 산사(山寺)에 가서 읽지 못한 책을 반드시 만 번을 읽었다. 백이전(伯夷傳)을 수십만 번을 읽었다. 이로 인해서 작은 서재의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했다.
◀(편집자 주)
율리사지 : 1644년(인조22)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불입상.
구석사(龜石寺) : 절골에 있는 조선조 초의 절로 청안현 남쪽 산이 높아 남향은 불이므로 불을 다스리는 것은 물, 물의 수족지신인 거북을 따서 구석사를 세웠다고 한다. 구석사는 지금은 폐찰 되고 당시 있던 탑신, 축대, 우물 등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임오년(壬午年:164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임인년(壬寅年:1662년)에 문과(文科)에 올랐다. 성균관 학유(成均學諭)를 거쳐 전적(典籍)에 승진했으며,-----드디어 괴산(槐山)으로 돌아가서 개향산(開香山) 선영(先塋) 옆에 집을 짓고 취묵(醉默)이라 편액(扁額)을 붙였다. 시(詩)와 술로 스스로 즐기며, 벼슬을 제수해도 나아가지 않았다. -----
◀(편집자 주)
<괴산(槐山) 개향산(開香山) 선영(先塋)>이라 함은 괴산 능촌리 조부(휘 시회)의 묘역인 듯하다. 현재의 취묵당 인근
◎갑자년(甲子年:1684년) 가을 이질병을 앓았으며 또한 등창을 앓아 8월 29일 돌아가니 81세였다.-----청안현(淸安縣) 좌구산(左龜山)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여기에 선영이 있기 때문이다.
◎공(公)의 저술(著述)은 매우 많으나 병자란(丙子亂) 때 많이 흩어져버려서 겨우 천 편이 남아있다. 산수를 너무 좋아하여, 금강산(金剛山)·백마강(白馬江) 및 호서사군등지(湖西四郡等地)에 놀러다녀, 발길이 두루 이르렀다.
◎비( )는 사천목씨(泗川睦氏)로, 이조참판첨(吏曺參判詹)의 딸이다. 공(公)의 배필(配匹)은 김씨로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아버지는 성발(聲發)로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도승지(都丞旨)의 증직(贈職)을 받았는데, 충암선생( 菴先生) 휘(諱) 정( )의 사세손(四世孫)이다.
<안풍군 柏谷 金得臣(1604년~1684)의 묘갈은 숙종14년(1688) 증평읍 율리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 세웠는데 비문은 游齋 李玄錫이 짓고 글씨는 9촌 조카인 金鳳至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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