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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여름캠프 답사자료집 6---충절의 본향! 괴산 능촌리와 충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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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8 23:13 조회1,5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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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난 충절의 본향! 괴산 능촌리와 충민사


1. 김석(金錫) 1495∼1534
   字는 공하(公瑕), 충렬공의 7세손이다. 을묘년(1495) 10월 11일에 출생하였다.
   중종조 進士에 급제하고, 정암 조광조(趙光租)의 門人으로 學文이 높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기묘사화로 은사인 조정암이 화를 당하자 서울 남산 아래인 주자동(지금의 회현동)에서 충북 괴산군 문광면 양곡리(文法里)로 일시 은둔불사 하였다가 외가인 의성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 전법리(典法里)로 옮겨 은거하였다. 이곳은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공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소지명을 금석골이라 한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장남 김충갑(金忠甲)은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아버지이고, 4남 김제갑(金悌甲)은 원주목사로 임진란때 순절하였다. 묘는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있고 四子 제갑(悌甲)이 쓴 비석이 있다.


2. 김충갑(金忠甲) 1515(중종10)∼1575(선조8)
   字는 서초(恕初), 호는 구암(龜岩)·오죽산인(悟竹山人), 진사 석(錫)의 장자. 1545年(明宗 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坪), 헌납(獻納), 북평사(北平事)를 거쳤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서울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직되고, 서청주(현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에 유배되었다가 선조 초에 방환되었다. 그 후 안악군수가 되었으며 요승보우(妖僧普雨)를 벌할 것을 누차 상소한 바 있다. 후에 보조공신 좌찬성 상락군(輔祚功臣 左贊成 上洛君)에 추증되었다.
   묘는 충북 중원군 살미면 무릉동에서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로 천봉(遷封)하였다. 문집으로 <龜巖集>(구암집)이 전한다.


3. 김제갑(金悌甲) 1525(중종20)∼1592(선조25).
   조선 중기의 문신. 의사(義士). 字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진사(進士) 석(錫)의 4子. 이황(李滉)의 문인으로서 1553년(명종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53년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가 되고, 3년 후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573년(선조6) 정언 (正言), 1581년(선조 14)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다. 1583년 우승지로 있으면서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李珥)·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8년 평안도지역 국경방어강화책의 일환으로 특별히 1589년 창성부사(昌城府使)로 임명되었지만, 70세에 가까운 늙은 문관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原州牧使)가 되어 왜장(倭將) 모리(森吉成)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 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경내의 요새인 영원산성(領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다. 그러나 산성의 허점을 틈탄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자 부인 이씨, 아들 시백(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 충절을 기려 1592년 이조판서 겸 경연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를 추증하였다.
   그 후 다시 1670년(현종11). 2. 7일에 원충갑, 김제갑, 원호의 원주 사우에 충렬이란 편액이 사액되었으며, 1711년(숙종37년)에  문숙(文肅)이란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재추증 되었다. 원주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는데 1866년(고종3)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그 사액인 <충렬사>현판은 괴산의 충민사 경내의 구 사우에 보관하고 있다. 괴산의 충민사 경내의 구 사우,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괴산 능촌리의 제각에 제향(祭享) 되고 있다.
   1966년 강원도 애국애족 부활위원회(江原道愛國愛族復活委 員會)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시문집으로 <의재유고(毅齋遺稿)>가 전한다.  묘소는 1988. 10. 5. 괴산읍 능촌리로 이안하였다.

4. 김인갑(김仁甲) : 1534년(중종29)--1594년(선조27).
  자는 선초(善初). 충북 괴산읍 전법리 출생. 진사 석(錫)의 5子. 어려서 부친의 작고로 나이 18세에 비로소 학문 시작. 1569(선조1. 35세)에 진사(進士) 급제. 1578(선조11)년에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從六品), 직장(直長)·제주의 감(監)을 거쳐 1586년(선조19) 주군자부(主軍資簿), 영산현감(永山縣監), 1590년(선조23. 57세)에 비안현감(庇安縣監)이 되었다.
  1592년(선조25. 59세) 임진왜란 발발 후 괴산 향가(鄕家)로 돌아와 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발병하여 壽 61세로 몰(歿)함.
후에 자(子) 시양(時讓:忠翼公. 荷潭)의 귀(貴)로 이조판서 지의금부사(吏曹判書 知義禁府事)에 추증(公 歿後 33년뒤인 1627년) 되었으며, 9년 뒤(1636년. 인조 14)에 子 시양(時讓)이 청백리에 녹선되자 다시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義禁府事 世子貳師 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從一品)으로 추증되었다.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 선영하이다.


4. 김시회(金時晦) 1542(중종 37)--1581(선조 14)
   자는 양오(養吾), 호는 양진재(養眞齋). 본관은 안동. 아버지는 헌납 충갑(忠甲)이다.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1년에는 예문관대교로서 홍섬(洪暹)·이이(李珥) 등과 함께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부평부사 등을 지냈다.1580년에는 한효순(韓孝純)·이항복(李恒福) 등과 함께 홍문록에 올라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이듬해 몰하였다.


5. 김시민(金時敏) 1554(명종9)∼1592(선조25).
   조선의 무신. 字는 면오(勉吾), 지평(持平) 충갑(忠甲)의 아들. 1578년(선조11) 무과(武 科)에 급제,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이 되었을 때 군사(軍事)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게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
   1591년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고 이듬 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죽은 목사(牧使)를 대신하여 성지(城地)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추어 목사로 승진되었다. 이어 사천(泗川)·고성(固城)·진해(鎭海) 등지에서 적을 격파하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올랐고 금산(金山)에서 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이 해 10월, 적의 대군이 진주성(晋州城)을 포위하자 불과 3천 8백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3만여의 사상자를 내고 적을 격퇴했다. 그러나 이 전투 후 순찰 도중에 적의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병에 의해 이마에 총탄을 맞고 얼마후에 몰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영의정·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증(追贈). 괴산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충민사(忠愍祠)> 시도기념물 12호 (지정일 1976.12.21)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1544∼1592)과 충무공의 숙부 의재 김제갑(1525∼1592)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선조 때 김시민과 김제갑의 절개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문화재청>
  <충민사>는 본래 1662년 숙종 때 진주성 내에 세워진 것을 고종(高宗) 5년(1868)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되자 장군의 신위를 진주성 내 <창열사(彰烈祠)>로 모시게 되었다.<문화재청>
   현재 괴산의 충민사는 1976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고, 1977년부터 79년까지 2억 7천여만의 사업비를 들여 2년간의 공사기간을 두고 신축했다. 이때 목조 건물이던 7평 규모의 구사당도 함께 정비되어 옆으로 이축됐다.
   얼마전까지도 충민사는 괴강나루터에서 밧줄과 도르래를 이용한 인도선을 타고 건너가야 했으나 몇 해전에 충무교를 가설하였다.
   현재 충민사 내에는 김시민 묘소, 13평 사당과 외삼문 내사문, 김제갑 신도비, 김시민 신도비, 충민사 유적정화기념비, 구 사당(원주에 있던 충렬사 현판과 선조 하사 현판 게판)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김시민 장군의 묘소>
   1592년 상여가 지나다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중원군 살미면 신당리 무릉동에 위치해 있다가 1979년 충주호 건설로 수몰 위기에 이르자 현재의 사당으로 이안되었고, 이때 부 김충갑의 묘와 송화공 김위(金緯-충갑의 손) 묘소도 함께 이안하여 충민사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장하던 중 미이라화된 김위의 시신과 함께 의복 다수가 출토되었다. 김위는 임진왜란 당시에 현감을 지냈다. 이때 출토된 의복 다수는 <중원김위묘출토유물(中原金緯墓出土遺物)> 중요민속자료 118호 (지정일 1981.11.11)로 지정되어 현재 충북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충무공 김시민장군 유적 현황>
시도기념물 166  (충남) 천안김시민장군유허지 충남 천안시 백전마을
사적 118  진주성(晋州城) 경남 진주시 진주시
문화재자료 5  (경남) 창열사(彰烈祠) 경남 진주시
시도유형문화재 1  (경남)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경남 진주시
시도유형문화재 2  (경남)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 경남 진주시
보물 952 광남군이광악선무공신교서(廣南君李光岳宣武功臣敎書)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시도기념물 12  (충북) 김시민장군충민사(金時敏將軍忠愍祠) 충북 괴산군


6. 김시백(金時伯)
   원주목사 毅齋 金悌甲의 둘째 아들로서 아버지를 따라 원주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의 아버지가 원주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자 「어버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어찌 홀로 살랴」하고 그의 아버지를 끌어안고 함께 죽으니 후에 선조가 이를 듣고 탄식하여, 「一門忠孝 萬古三綱」이라 하였으며 호조참의를 증직하고 후에 원주 충열사와 괴산군 능촌리 충열사에 합향하였다.


7. 김시양(金時讓) 1581(선조14)∼1643(인조21).
   조선의 문신.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비안현감(比安縣監) 인갑(仁甲)의 아들. 1605년(선조3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숭문원 정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주서를 거쳐 예조 좌랑으로 지제교를 겸하다가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611년(광해군3)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가 되어 지방향시를 주관할 때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를 출제했다 하여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移配) 되었다.
   1623년 인조 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예조정랑(禮曹正郞)·병조정랑·수찬 (修撰)·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이듬해(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 난이 평정된 후 응교(應敎)로 문학(文 學)을 겸임,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경상감사로 있을 때 경상좌도와 우도의 전결(田結)이 일치하지 않음을 상소하여 균일하게 정비하였으며,정묘호란(丁卯胡亂:1627) 후 서북 지방의 경비가 중요시 되자 1629년(인조7)에 특히 평안도 관찰사 겸 체찰부사로 발탁되었다. 1631(인조9) 병조판서에 올라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사도 체찰사(四道 體察使) 등을 겸임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그 후 강화 유수(江華留守)·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34년(인조12)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호조판서, 세자좌부빈객, 강화유수를 거쳐 1641년(인조19)「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改修)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판춘추관사(判春秋館事)로서 이에 참여했다. 그러나 안질(眼疾)로 맹인(盲人)이 되었으므로 중도에 사직하였다.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인조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643년(인조 21)에 충주 하담리의 사제에서 별세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 회령(會寧)의 향사(鄕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숙종때(1691. 숙종 17년) 忠翼을 시호로 받았다.
   저서:<忠翼公 荷潭先生 遺稿>(<부溪紀聞>, <荷潭破寂錄>, <紫海筆談> 등이 수록)


8. 김휘(金穀) 1599(선조32)--1661(현종2)
   字는 돈적(敦謫), 음보로 올라 합천(陜川)군수를 지냄. 壽 63세이며 묘는 개향산(開香山-괴산읍 능촌리) 자좌(子坐)이다.


9. 김 휘(김徽) : 1607(선조 40)---1677(숙종 3)
    조선의 문신. 화가. 字는 돈미(敦美), 호는 사휴정(四休亭)·사휴제(四休第),만은(晩隱), 시양(時讓)의 次子. 1642년(인조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봉교(奉敎)가 되었고, 1646년(인조 24년) 민회빈(愍懷嬪) 강씨가 억울하게 사사(賜死)되자 정언(正言)으로 재직하면서 사사(賜死)의 배후를 규명하라고 상소를 했다가 파직되었다.
1649년(효종즉위) 부수찬(副修撰)에 기용, 이조 좌랑과 정랑(吏曹正郞), 교리(校理), 응교(應敎), 헌납(獻納), 사간(司諫), 집의(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 연간에는 충청도 관찰사, 도승지 (都承旨),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1665년(현종6)에는 경상도 관찰사에 이어 강화유수, 황해도 관찰사, 평안도, 함경도, 충청도 관찰사를 등을 역임하였다. 1666년 남인(南人)의 탄핵으로 삭직(削職) 당했다가 1668년(현종 9)에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고, 대사헌을 거쳐 1675년(숙종1)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예조판서, 개경유수(開京留守)를 역임하였다. 수(壽) 71세. 하담공(時讓)의 二子.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에 있다. 그림을 잘 그렸다.


10. 김번(金繁) 1604(선조 37)--1671(현종 12)
   양덕공(陽德公, 諱 時說)의 二子. 무과(武科) 급제. 지혜와 용기를 고루 갖췄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장사(壯士)로 추천되었고, 선전관(宣傳官) 겸 세마(洗馬)를 제수 받았다.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심양(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곳)에서 8년간 모셨다. 귀국해서는 안주판관(安州判官)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자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후 효종께서 <南山歌>(현재 不傳)란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壽 68세이며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이다.


11. 취묵당(醉默堂)
    백곡 김득신이 만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괴산에 내려와 은둔하면서 시를 짓고 유유자적할 때 지은  정자이다.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의 끝자락에 괴강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서 백이전을 1억 일천만 번을 읽었다 하여 억만재라고도 한다.  

백곡 김득신 묘갈명 중에서
◎을유년(乙酉年:1625년) 안흥군(安興君)의 상을 당했다. 상을 마친 후에 문장이 더욱 발전하여 선배들이 무릎을 꿇었으며 영화로운 명성이 크게 떨쳤다. -----책상자를 짊어지고 산사(山寺)에 가서 읽지 못한 책을 반드시 만 번을 읽었다. 백이전(伯夷傳)을 수십만 번을 읽었다. 이로 인해서 작은 서재의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했다.

◎임오년(壬午年:164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임인년(壬寅年:1662년)에 문과(文科)에 올랐다. 성균관 학유(成均學諭)를 거쳐 전적(典籍)에 승진했으며,-----드디어 괴산(槐山)으로 돌아가서 개향산(開香山) 선영(先塋) 옆에 집을 짓고 취묵(醉默)이라 편액(扁額)을 붙였다. 시(詩)와 술로 스스로 즐기며, 벼슬을 제수해도 나아가지 않았다. -----

◎갑자년(甲子年:1684년) 가을 이질병을 앓았으며 또한 등창을 앓아 8월 29일 돌아가니 81세였다.-----청안현(淸安縣) 좌구산(左龜山)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여기에 선영이 있기 때문이다.


12. 김가행(金可行)  1654∼1731
   字는 경부(敬夫), 임란 진주대첩 김시민의 현손이요 남봉 김치의 증손이며 백곡 김득신(栢谷 金得臣)의 손자요 김천규(金天揆)의 아들이다. 상락군(휘 충갑)-상락부원군(휘 시민)-안흥군(휘 치)-안풍군(휘 득신)-화은군(휘 천주)-동은군(휘 가행) 6대 봉군의 후예가 된다.
   1711년(숙종 37)에 연천현감(漣川縣監)이 되어 청렴하게 선치(善治)하니 관찰사가 임금께 아뢰고 읍민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칭송하였으며, 1728년(영조 4) 양치도(楊致道)의 난때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종군(從軍)하여 양무(楊武) 1등훈(等勳)에 녹선(錄選)되었다. 그의 영정(影幀)은 괴산읍 능촌리 영정각(影幀閣)에 봉안(奉安) 되고 있다.
   <연천사(連川祠)>
   1711년 (영조13) 연천현감(連川縣監)을 지낸 김가행(金可行)의 영정(影幀)을 모신 영당(影堂)이다. 영정은 관복(官服)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가로 99cm, 세로 165cm의 설채견본(設彩絹本)인데 제작 연대와 화가는 미상이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반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담장을 둘렀다. 대문 앞에 1996년 8월에 세운 비가 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가행은 억지로 자기의 초상화를 뺏어가지고 와서 감추어 두었다<천안시지>. 이 영정각은 그 후 6년이 지나서 후손들이 연천에서 이곳 능촌으로 봉환하였으며, 묘는 동북방면 약 2km거리의 원당산록에 모셔져 있다<영정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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