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의 인물·2월]조선중기 원주목사 김제갑-안동김씨세상[충렬공 후손] 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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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4-08-01 22:55 조회1,702회 댓글0건본문
[강원의 인물·2월]조선중기 원주목사 김제갑
( 문화면 2004-2-2 기사 )
-왜적 칼날 앞에 굽히지 않은 충절
김제갑(金悌甲)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순초(順初), 호(號)는 의재(毅齋)이다. 고려의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부친은 석(錫)이고,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 8년(1553)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 병조좌랑·정언을 거쳐 선조 14년(1581)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선조 16년(1583) 우승지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있으면서 왜장 삼길성(森吉成)이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 오자 가족과 고을 백성을 이끌고 영원산성(영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으나, 왜적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어 부인 이씨(李氏)와 아들 시백(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충절을 기려 선조 25년 10월 21일 이조판서 겸 경연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의금부도사 성균관 춘추관사에 추증하였다.
원주의 충렬사(忠烈祠)와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숙종 37년(1711) `문숙(文肅)’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서는 원주역전에 그를 추모하는 충렬탑(忠烈塔)을 현종 11년(1670)에 건립된 충렬비 옆에 세웠다.
충렬비에 기록된 명문(銘文)에는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어야 할 곳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오직 군자라야만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이다. 위급함을 당하여도 평소와 같이 보고 충성심과 분개심을 가다듬어 끝과 시작이 다르지 않았도다.신하는 충성으로 죽고, 부인은 죽어 정절을 지켰으며, 아들은 죽어 효도를 다하였으니 여기 만고(萬古)에 삼강과 오륜을 남겼도다. 치악산이 동쪽에 우뚝 솟고 봉천(鳳川)은 서쪽으로 흐르니 선생의 이름과 함께 길이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종 개수실록 11년(1670) 2월 7일 을축 조에 “원주목에 있는 원충갑·김제갑·원호의 사당에 `충렬(忠烈)’이라 사액하였다. 원충갑은 고려 사람으로 일찍이 향병을 모집하여 합단을 격퇴하였는데, 그러한 일은 고려사에 실려 있다. 임진년(1592)의 난리에 김제갑은 원주목사였고, 원호는 방어사 였는데, 모두 힘껏 싸우다가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원주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묘액(廟額)을 내려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원주 조에 이르기를 “김제갑은 소경왕(昭敬王;선조)때 원주목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병 광척(光拓)이 고을 가까이 오니 지키는 병사들이 모두 달아나고 숨었으므로, 김제갑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땅을 지킬 신하는 난리를 당해서는 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하고, 홀로 영원산성을 보수하고 기계(器械)를 수리하고 백성을 독려하며 지켰다. 왜적이 크게 이르러 성(城)이 함락되자, 왜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아들 시백이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사망하였는데 도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끝내 시신 곁을 떠나지 않다가 왜적에게 해를 입었다.”(金悌甲昭敬王朝爲原州牧使壬辰之亂倭兵光拓近邑守?皆走竄悌甲歎曰守土之臣臨亂惟有一死獨保?原山城修飭器械勵衆拒守賊大至城陷罵賊不屈死子時伯曰父死不可去終不離父屍傍爲賊所害)라고 기록돼 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원주목 조에 “산성사(山城寺)는 영원산성 안에 있다. 임진왜란 때 목사 김제갑이 병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거점으로 하였으나, 왜적에게 졸지에 함락되어 고을의 군사 및 피난한 백성들 모두가 죽었다. 김제갑이 죽고 그 뒤에 승장(僧將)을 설치하여 영원산성을 수호하였다. 산성은 무너지고 절도 없어져 마침내 승장을 혁파하고 군기와 향곡을 고을 안으로 옮겨 두었다. 산성사 서쪽 연안에 단을 쌓았는데, 가뭄이 들었을 때 관리를 보내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이로써 전쟁에서 죽은 장사를 위로한다.”(山城寺在?原城中壬辰倭亂牧使金悌甲領兵入據賊兵猝陷州軍及避亂人民俱沒悌甲死之厥後設置僧將守護山城矣城?寺廢遂罷僧將移置軍器餉穀於州內寺之西岸築壇天旱則遣官致祭于此以慰戰亡將士)고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원주 조에 “선조 25년에 왜적의 우두머리 길성중융이 철령에서 나누어 관동을 향하여 모든 고을을 유린하며 장차 원주를 핍박하려 하니 원주목사 김제갑과 여주목사 원호(元豪)가 병사를 이끌고 영원산성으로 들어갔다. 성은 사면이 모두 절벽이며 앞에 길 하나만이 통하여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성에 점차로 들어와 드디어 함락되었으나 김제갑은 굴복하지 않았고, 그의 아내와 아들도 함께 전사하였다.”(宣祖二十五年倭酋吉盛重隆自鐵嶺分向關東蹂躪列邑將迫原州本州牧使金悌甲驪州牧使元豪領兵入翎原山城城四面皆絶壁前通一路賊緣崖潛進城遂陷悌甲不屈與其妻子同死) 라고 하였다.
또한 선조 수정실록 25년 8월 1일 무자조를 상고하면 “적병이 원주 영원산성을 함락시켜 목사 김제갑이 전사하였다. 이에 앞서 관동(關東)의 주현이 모두 적에게 노략질 당하였으나 원주만은 온전하였다. 적이 이미 원호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드디어 곧바로 원주로 침입하니, 원주목사 김제갑이 고을 안의 사대부와 서민 그리고 온 가족을 데리고 산성으로 들어갔는데 험한 지세만 믿고 설비를 하지 않았다. 적이 두세 번 성 밖까지 왔다가 되돌아가므로 성안의 사람들은 더욱 그들을 얕잡아 보았다. 하루는 적이 잠깐 퇴각하는 체하다가 곧바로 군사를 돌려 허점을 틈타 습격하였으므로 성이 금방 함락되었다. 김제갑은 굴하지 않고 전사하였는데, 처자도 모두 따라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한 가문에서 충(忠)·효(孝)·열(烈)이 나왔다고 하였다. 왜적이 드디어 원주에 주둔하고 군영을 지평현까지 연결하여 수도에 이르는 길을 확보하였다.” 라고 기록되었다.
원주 영원산성대첩제 위원회에서는 원충갑 장군의 대첩을 기리고 김제갑목사등 영원산성에서 나라를 위해 선혈을 뿌리신 많은 순국 선현들의 한 맺힌 원혼을 위무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영원산성 대첩제를 봉행하고 있다.
■박문성-평원문화연구소장
출:강원일보
( 문화면 2004-2-2 기사 )
-왜적 칼날 앞에 굽히지 않은 충절
김제갑(金悌甲)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순초(順初), 호(號)는 의재(毅齋)이다. 고려의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부친은 석(錫)이고,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 8년(1553)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 병조좌랑·정언을 거쳐 선조 14년(1581)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선조 16년(1583) 우승지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있으면서 왜장 삼길성(森吉成)이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 오자 가족과 고을 백성을 이끌고 영원산성(영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으나, 왜적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어 부인 이씨(李氏)와 아들 시백(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충절을 기려 선조 25년 10월 21일 이조판서 겸 경연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의금부도사 성균관 춘추관사에 추증하였다.
원주의 충렬사(忠烈祠)와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숙종 37년(1711) `문숙(文肅)’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서는 원주역전에 그를 추모하는 충렬탑(忠烈塔)을 현종 11년(1670)에 건립된 충렬비 옆에 세웠다.
충렬비에 기록된 명문(銘文)에는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어야 할 곳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오직 군자라야만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이다. 위급함을 당하여도 평소와 같이 보고 충성심과 분개심을 가다듬어 끝과 시작이 다르지 않았도다.신하는 충성으로 죽고, 부인은 죽어 정절을 지켰으며, 아들은 죽어 효도를 다하였으니 여기 만고(萬古)에 삼강과 오륜을 남겼도다. 치악산이 동쪽에 우뚝 솟고 봉천(鳳川)은 서쪽으로 흐르니 선생의 이름과 함께 길이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종 개수실록 11년(1670) 2월 7일 을축 조에 “원주목에 있는 원충갑·김제갑·원호의 사당에 `충렬(忠烈)’이라 사액하였다. 원충갑은 고려 사람으로 일찍이 향병을 모집하여 합단을 격퇴하였는데, 그러한 일은 고려사에 실려 있다. 임진년(1592)의 난리에 김제갑은 원주목사였고, 원호는 방어사 였는데, 모두 힘껏 싸우다가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원주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묘액(廟額)을 내려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원주 조에 이르기를 “김제갑은 소경왕(昭敬王;선조)때 원주목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병 광척(光拓)이 고을 가까이 오니 지키는 병사들이 모두 달아나고 숨었으므로, 김제갑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땅을 지킬 신하는 난리를 당해서는 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하고, 홀로 영원산성을 보수하고 기계(器械)를 수리하고 백성을 독려하며 지켰다. 왜적이 크게 이르러 성(城)이 함락되자, 왜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아들 시백이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사망하였는데 도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끝내 시신 곁을 떠나지 않다가 왜적에게 해를 입었다.”(金悌甲昭敬王朝爲原州牧使壬辰之亂倭兵光拓近邑守?皆走竄悌甲歎曰守土之臣臨亂惟有一死獨保?原山城修飭器械勵衆拒守賊大至城陷罵賊不屈死子時伯曰父死不可去終不離父屍傍爲賊所害)라고 기록돼 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원주목 조에 “산성사(山城寺)는 영원산성 안에 있다. 임진왜란 때 목사 김제갑이 병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거점으로 하였으나, 왜적에게 졸지에 함락되어 고을의 군사 및 피난한 백성들 모두가 죽었다. 김제갑이 죽고 그 뒤에 승장(僧將)을 설치하여 영원산성을 수호하였다. 산성은 무너지고 절도 없어져 마침내 승장을 혁파하고 군기와 향곡을 고을 안으로 옮겨 두었다. 산성사 서쪽 연안에 단을 쌓았는데, 가뭄이 들었을 때 관리를 보내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이로써 전쟁에서 죽은 장사를 위로한다.”(山城寺在?原城中壬辰倭亂牧使金悌甲領兵入據賊兵猝陷州軍及避亂人民俱沒悌甲死之厥後設置僧將守護山城矣城?寺廢遂罷僧將移置軍器餉穀於州內寺之西岸築壇天旱則遣官致祭于此以慰戰亡將士)고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원주 조에 “선조 25년에 왜적의 우두머리 길성중융이 철령에서 나누어 관동을 향하여 모든 고을을 유린하며 장차 원주를 핍박하려 하니 원주목사 김제갑과 여주목사 원호(元豪)가 병사를 이끌고 영원산성으로 들어갔다. 성은 사면이 모두 절벽이며 앞에 길 하나만이 통하여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성에 점차로 들어와 드디어 함락되었으나 김제갑은 굴복하지 않았고, 그의 아내와 아들도 함께 전사하였다.”(宣祖二十五年倭酋吉盛重隆自鐵嶺分向關東蹂躪列邑將迫原州本州牧使金悌甲驪州牧使元豪領兵入翎原山城城四面皆絶壁前通一路賊緣崖潛進城遂陷悌甲不屈與其妻子同死) 라고 하였다.
또한 선조 수정실록 25년 8월 1일 무자조를 상고하면 “적병이 원주 영원산성을 함락시켜 목사 김제갑이 전사하였다. 이에 앞서 관동(關東)의 주현이 모두 적에게 노략질 당하였으나 원주만은 온전하였다. 적이 이미 원호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드디어 곧바로 원주로 침입하니, 원주목사 김제갑이 고을 안의 사대부와 서민 그리고 온 가족을 데리고 산성으로 들어갔는데 험한 지세만 믿고 설비를 하지 않았다. 적이 두세 번 성 밖까지 왔다가 되돌아가므로 성안의 사람들은 더욱 그들을 얕잡아 보았다. 하루는 적이 잠깐 퇴각하는 체하다가 곧바로 군사를 돌려 허점을 틈타 습격하였으므로 성이 금방 함락되었다. 김제갑은 굴하지 않고 전사하였는데, 처자도 모두 따라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한 가문에서 충(忠)·효(孝)·열(烈)이 나왔다고 하였다. 왜적이 드디어 원주에 주둔하고 군영을 지평현까지 연결하여 수도에 이르는 길을 확보하였다.” 라고 기록되었다.
원주 영원산성대첩제 위원회에서는 원충갑 장군의 대첩을 기리고 김제갑목사등 영원산성에서 나라를 위해 선혈을 뿌리신 많은 순국 선현들의 한 맺힌 원혼을 위무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영원산성 대첩제를 봉행하고 있다.
■박문성-평원문화연구소장
출:강원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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