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모부(旦暮賦)-충렬공의 공적을 찬탄하여지은 글-이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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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4-08-02 21:44 조회1,602회 댓글0건본문
단모부(旦暮賦) -이승휴-
전(傳)에 이르기를, "...만세 이후에나 이 말 뜻을 이해하는 한 성인(聖人)이 나타나면 그것은 아침에
만났다가 저녁에 만난 듯이 대단히 일찍 만난 것이라..." 하였으니 정성스럽다 이말이여. 지금 새로
책봉된 상락군 개국공 경조 (上洛郡開國公京兆) 김방경(金方慶)저하는 원묘조(元朝)11년(1270년)에
재상이 되고, 임금이 왕위에 있던 초에 이르러 지위가 상상(上相)올랐으며, 송도(松都)에서 도읍을
옮기던 시기에 뜻을 펴지 못하여 날뛰던 무리가 강화도에 까마귀 떼처럼 모여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진도에 모여 있으면서 인근 주를 삼키고 바다를 점거해서 날뛰니, 일이 도모하기 어려웠다.
이에 상국(上國)이 명하여 관군(官軍)을 내여, 본군(本軍)과 합하여 정벌할 때에 공이 황제의 성지를
받드니, 진퇴의 법칙이 평소에 훈련한 바가 아니었으나 양국의 군사가 모두 그 마음을 얻어서 마치
팔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과 같았다. 한 번 거사함에 그들을 양떼 몰아내듯이 평정하니, 부녀자들이
개가를 노래하고, 군대는 돌아왔다. 또 상조(上朝)의 원수(元帥) 혼독(혼篤)과 더불어 같이 왜국을
칠 적에,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전쟁을 지휘하며 해가 돋아 오르는 바다 끝까지 들어갔다. 황제의
위엄을 혁혁히 빛내고 미역(尾域)지역을 편안히 하고, 무덕(武德)을 선포해서 큰 공을 아뢰니 황제께서
크게 기뻐하였고, 전후(前後)의 공을 크게 드날려서 그를 동번제로도원수(東번諸路都元帥)로 삼아서
특별한 은총으로 포상하였다. 이로부터 동쪽 정벌이 없는 해가 없었고, 어떤 싸움에도 공이 거느리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 처음부터 끝까지의 수전(水戰)·육전(陸戰)의 기이한 계책이 국사(高麗史)에 갖춰 실려 있다.
이해 11월 12일에 안집사(安集使)가 전한바, 영공(令公)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이가 84세가 되어
앞으로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세자 전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나라에 공이 있는 노인에게 특별한
상이 없으면 어떻게 후인(後人)들을 권장할 수 있겠느냐'고 여기시고 그 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삼았는데, 실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
제가 공경히 꿇어 엎드려 편지를 받들어 읽고, 거듭 그 사실을 밝혀서 평하여 말하였다. 종신(宗臣=왕족)
과 석보(碩輔=재상)로서 중국에 조알하고 왕래한 자가 고조선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자취가
서로 이어졌으되, 그 도원수(都元帥)의 직임(職任)을 받은 자가 있었던가? 그런 소문을 듣지 못했도다.
또한 공(公)이란 오등제후 (五等諸侯=공,후,백,자,남)의 으뜸 작위(爵位)이므로, 외부로 나가면 열국의
으뜸이 되고, 천자에게로 들어오면 천자의 다음이 되니, 그 등급은 발돋움을 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혹시 시기를 잘 타고 갑자기 일어나서, 전쟁터의 털끝 만한 공도 없으면서, 다만 서울을 휩쓸
정도의 권세로써 외람되게 나아가서, 높은 자리를 맡는 자도 있으나, 그것은 일이 잘못되고 여러 사람들
의 비난을 받게 되니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니다. 우리 공과 같은 분에 이르러서는 이 세상에 사명을 띠고
나와 패왕(覇王)을 보필할 만한 영특한 재능으로 충(忠)과 의(義)와 인(仁)과 용(勇)과 지(知)와 모(謀)가
한 가지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서,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재상을 하였고, 동쪽을 정벌하고 북으로
사신을 갔는데 험한 파도가 용솟음 쳤으나 뱃머리는 그 어지러운 것을 헤치고 나아갔고, 아득한 북쪽
변방에 말발굽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다. 험하고 또한 어려울 즈음에도 진실로 문(文)과 무(武)의
지략을 발휘하여 무용이 대단해서 우뚝하게 서서 분발하여 자기 일신의 삶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졸과 더불어 고생을 같이하며, 활과 돌을 무릅쓰고 나아갔다.
그래서 해외(海外)의 다른 나라에 우리 나라의 무공을 드날려, 조공(朝貢)하지 않는 나라를 토벌하여
천자에게 승첩을 바쳤다. 사해의 군주이신 황제가 헌함에 기대어 돌아보고 물었는데, 위엄스런 얼굴을
지척에 대하고서도 재량껏 대답하는 논변을 발휘하여 또다시 천자의 장려를 입게 되었다. 비록 소백
(小伯)이 천하를 한 번 바로잡은 것과 진후(晉候)가 세차례 천자를 뵈러 간 것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훌륭한 공명을 세우고서도 몸가짐을 겸겸히 하여 항상 자기를 낮추며,
평탄하게 대도를 이행해서, 삼달존(三達尊), 녹야당(綠野堂)의 지위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구중궁궐에서는 공신에 봉하여 대려의 잊기 어려운 맹세를 돈독히 했고, 온 나라에서는 '아형(阿衡)만이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겠는가?'라는 감탄을 일으켰으니 참으로 그 나이가 높을수록 그 덕은 더욱
높다 하겠다. 우리 전하께서는 덕은 중윤(重輪)보다 더 뛰어나고, 뜻은 오로지 나라를 감독하는데
두었다. 그래서 어진 사람을 초치하는 북을 올리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는 깃발을 세워서 힘쓰고
노력하기를 급급하게 하면서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겼으니 마땅히 이런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이런 사람을 일컬어 말하게 되고 이런 사람을 성심으로 사모하게 된다는 것은 천하의 공언(公言)이니,
그 누가 이 일을 기뻐하지 않겠는가. 우리 폐하께선 사람은 오직 옛사람을 구하고, 착한 것은 반드시
따른다는 마음으로 기둥과 주춧돌 같은 대신(大臣)의 공로에 보답할 것을 기약해서 마침내 훌륭한
명을 내려서 상락군(上洛郡)에 봉하여 공(公)으로 삼으니 이는 후현(後賢)들의 길을 넓힌 것이다.
이것은 실로 천하의 공적인 장려이니, 그 누가 이 상(賞)을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공(公)이
오늘날 공(公)이 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요행으로 공(公)이 된 것과는 다르다. 대개 하늘은 사람이
원하는 바를 따라서 덕 있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이미 그 상수(上壽)를 주어서 그 몸을 편케
했으되, 뜻이 오히려 부족해서 또 상작(上爵)을 주어서 그 지위를 높게 해주었다. 원컨대, 공(公)은
하늘의 뜻을 받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순응해서, 그 분수를 편케 여겨서 영화를 누리소서. 앞에서
이른바 "만세의 뒤에 한 번 성인을 만나 그 견해를 안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삼가
고부(古賦)를 지어서 이름하여 『단모부(旦暮賦)』라 하고 멀리서 상락공 궤장(궤杖) 아래에 바칩니다.
그 사(辭)는 다음과 같다
성군(聖君)이 태어남이여!
풍운(風雲)의 길을 열고,
재상과 함께 조정에 진출(進出)함이여,
경위(經緯)를 도모했다.
타고난 충성심(忠誠心)을 다하여 삼한(三韓)을 도우고,
황비(荒肥)에 으뜸이 되매, 만민을 편안케 하였도다.
중조(中朝)에 조회를 가서 큰 공을 아뢰고,
동로(東路)에 길잡이가 됨이여, 도원수가 되었도다.
군사가 백만이 됨이여, 더욱 더 잘 다스렸고,
춘추가 80에 4년이 지났도다.
정신은 맑고 기운은 장대함이여, 몸은 기력이 강건하였네.
나이가 많고 덕이 높으니,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하도다.
중신(中宸)은 옛 일을 도모하는 뜻을 돈독히 하여 잊지 않고,
동궁(東宮)이 나라를 감독함이여! 태평정치를 아름답게 이루었도다.
후현들을 격려하기를 기약함이야,
포상하여 책봉하고, 개국공상락군(開國公上洛郡)으로 봉해 줌이여,
공(公)으로 은총을 내려주었다.
맏아들 영공(令公)은 월편(越篇)을 계승했고,
막내아들은 학사가 되어 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도다.
여러 손자들의 빛남이여,
뜰에 가득하고 손님들이 환호하며 왁자지껄함이여! 마을에 가득하도다.
어깨를 부딪히며 헌수하며 종종걸음치고,
길가는 사람들도 공(公)을 어질다 말하며 눈물을 흘리도다.
송나라 왕형공(王荊公)이 있음이여! 경륜을 양보하였고,
당나라 곽분양(郭汾陽)이 있음이여! 그 시작과 마침이 다소 부끄러웠다.
송축(頌祝)의 노래 소리는 조야(朝野)에 드날림이여!
장수(長壽)를 축원하고 미담이 어부와 초부에게도 미침이여,
성대한 일을 자랑하도다.
원숭이가 울고 학이 울음이여 환성으로 전송하고,
잣나무가 좋아하고 소나무도 기뻐하며 축하의 뜻을 베풀도다.
****
이승휴(李承休)
1224(고종 11)∼1300(충렬왕 26). 고려의 문신. 자는 휴휴(休休),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 경산부 가리현(京山府加利縣)사람으로 가리이씨(加利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12세에 원정국사(圓靜國師)의 방장(方丈)에 들어가 신서(申#서41)에게서 《좌전 左傳》과 《주역 周易》 등을 익혔으며, 125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다음해에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현(三陟縣)으로 갔다가 마침 몽고의 침략으로 길이 막히자, 그곳 두타산 구동(頭陀山龜洞)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263년(원종 4)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유천우(兪千遇)·원부(元傅)·허공(許珙)·박항(朴恒) 등에게 구관시(求官詩)를 지어 보내고, 다음해에 이장용과 유경의 천거를 받아 경흥부서기(慶興府書記)에 보임되었다.
1270년 삼별초가 봉기하였을 때에는 군수(軍需)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횡렴(橫斂)과 영선(營繕)으로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음을 들어 그 폐해를 극론(極論)하였으며, 1273년에는 식목록사(式目錄事)로 있으면서 당시 공이 없는 사람들이 관직에 초배(超拜)되는 것이 불가하다는 상소문을 초안하였다가 오히려 파직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에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 공으로 잡직령 겸 도병마녹사(雜職令兼都兵馬錄事)에 제수되었다.
다음해에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하여 또 한번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사행(使行)하였는데, 당시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호복(胡服)을 입고 장례를 치를 것을 염려하여 상복을 고려식으로 하도록 권유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우정언(右正言)이 되었으며, 이때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15개조로 나누어 간쟁하였다.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충청도안렴사(楊廣忠淸道按廉使)가 되어서는 장리(贓吏)7명을 탄핵하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가 원한을 사게 되어 곧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었는데, 이때부터 스스로를 동안거사라 하였다.
얼마 뒤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임명되었으나 1280년(충렬왕 6)감찰사의 관원들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삼척현의 구동으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당호(堂號)를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 歸去來辭〉에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하고, 여기서 《제왕운기》와 《내전록 內典錄》을 저술하였다.
또한, 만년에는 불교에 몰입하여 용안당을 간장사(看藏寺)로 고치고 토지를 희사하기도 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개혁정치를 추진할 때 특별히 기용되어 사림시독학사 좌간의대부 사관수찬관 지제고(詞林侍讀學士左諫議大夫史館修撰官知制誥)에 임명되었으며, 곧 사림시독학사 시비서감 좌간의대부(詞林侍讀學士試#비58書監左諫議大夫)를 거쳐 동첨자정원사 판비서시사 숭문관학사(同簽資政院事判#비58書寺事崇文館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70세가 넘어 현관(顯官)에 제수되는 것이 국가의 제도에 어긋남을 들어 거듭 사직을 요청하였고, 결국 같은해에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密直副使監察大夫詞林學士承旨)로 치사(致仕)하였다.
저작으로서 《제왕운기》가 있고, 아들 이연종(李衍宗)이 편집한 문집 《동안거사집 東安居士集》이 전하여지고 있다.
《제왕운기》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칠언시와 오언시로 엮은 서사시로서, 이승휴를 비롯한 당대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에 대해서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는 속에서 민족문화의 우월성과 역사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자주적인 역사서라는 것에서부터, 유교사관을 내세워 원나라에 대한 사대를 합리화하는 사대적·비자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 다양한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전(傳)에 이르기를, "...만세 이후에나 이 말 뜻을 이해하는 한 성인(聖人)이 나타나면 그것은 아침에
만났다가 저녁에 만난 듯이 대단히 일찍 만난 것이라..." 하였으니 정성스럽다 이말이여. 지금 새로
책봉된 상락군 개국공 경조 (上洛郡開國公京兆) 김방경(金方慶)저하는 원묘조(元朝)11년(1270년)에
재상이 되고, 임금이 왕위에 있던 초에 이르러 지위가 상상(上相)올랐으며, 송도(松都)에서 도읍을
옮기던 시기에 뜻을 펴지 못하여 날뛰던 무리가 강화도에 까마귀 떼처럼 모여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진도에 모여 있으면서 인근 주를 삼키고 바다를 점거해서 날뛰니, 일이 도모하기 어려웠다.
이에 상국(上國)이 명하여 관군(官軍)을 내여, 본군(本軍)과 합하여 정벌할 때에 공이 황제의 성지를
받드니, 진퇴의 법칙이 평소에 훈련한 바가 아니었으나 양국의 군사가 모두 그 마음을 얻어서 마치
팔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과 같았다. 한 번 거사함에 그들을 양떼 몰아내듯이 평정하니, 부녀자들이
개가를 노래하고, 군대는 돌아왔다. 또 상조(上朝)의 원수(元帥) 혼독(혼篤)과 더불어 같이 왜국을
칠 적에,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전쟁을 지휘하며 해가 돋아 오르는 바다 끝까지 들어갔다. 황제의
위엄을 혁혁히 빛내고 미역(尾域)지역을 편안히 하고, 무덕(武德)을 선포해서 큰 공을 아뢰니 황제께서
크게 기뻐하였고, 전후(前後)의 공을 크게 드날려서 그를 동번제로도원수(東번諸路都元帥)로 삼아서
특별한 은총으로 포상하였다. 이로부터 동쪽 정벌이 없는 해가 없었고, 어떤 싸움에도 공이 거느리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 처음부터 끝까지의 수전(水戰)·육전(陸戰)의 기이한 계책이 국사(高麗史)에 갖춰 실려 있다.
이해 11월 12일에 안집사(安集使)가 전한바, 영공(令公)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이가 84세가 되어
앞으로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세자 전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나라에 공이 있는 노인에게 특별한
상이 없으면 어떻게 후인(後人)들을 권장할 수 있겠느냐'고 여기시고 그 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삼았는데, 실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
제가 공경히 꿇어 엎드려 편지를 받들어 읽고, 거듭 그 사실을 밝혀서 평하여 말하였다. 종신(宗臣=왕족)
과 석보(碩輔=재상)로서 중국에 조알하고 왕래한 자가 고조선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자취가
서로 이어졌으되, 그 도원수(都元帥)의 직임(職任)을 받은 자가 있었던가? 그런 소문을 듣지 못했도다.
또한 공(公)이란 오등제후 (五等諸侯=공,후,백,자,남)의 으뜸 작위(爵位)이므로, 외부로 나가면 열국의
으뜸이 되고, 천자에게로 들어오면 천자의 다음이 되니, 그 등급은 발돋움을 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혹시 시기를 잘 타고 갑자기 일어나서, 전쟁터의 털끝 만한 공도 없으면서, 다만 서울을 휩쓸
정도의 권세로써 외람되게 나아가서, 높은 자리를 맡는 자도 있으나, 그것은 일이 잘못되고 여러 사람들
의 비난을 받게 되니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니다. 우리 공과 같은 분에 이르러서는 이 세상에 사명을 띠고
나와 패왕(覇王)을 보필할 만한 영특한 재능으로 충(忠)과 의(義)와 인(仁)과 용(勇)과 지(知)와 모(謀)가
한 가지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서,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재상을 하였고, 동쪽을 정벌하고 북으로
사신을 갔는데 험한 파도가 용솟음 쳤으나 뱃머리는 그 어지러운 것을 헤치고 나아갔고, 아득한 북쪽
변방에 말발굽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다. 험하고 또한 어려울 즈음에도 진실로 문(文)과 무(武)의
지략을 발휘하여 무용이 대단해서 우뚝하게 서서 분발하여 자기 일신의 삶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졸과 더불어 고생을 같이하며, 활과 돌을 무릅쓰고 나아갔다.
그래서 해외(海外)의 다른 나라에 우리 나라의 무공을 드날려, 조공(朝貢)하지 않는 나라를 토벌하여
천자에게 승첩을 바쳤다. 사해의 군주이신 황제가 헌함에 기대어 돌아보고 물었는데, 위엄스런 얼굴을
지척에 대하고서도 재량껏 대답하는 논변을 발휘하여 또다시 천자의 장려를 입게 되었다. 비록 소백
(小伯)이 천하를 한 번 바로잡은 것과 진후(晉候)가 세차례 천자를 뵈러 간 것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훌륭한 공명을 세우고서도 몸가짐을 겸겸히 하여 항상 자기를 낮추며,
평탄하게 대도를 이행해서, 삼달존(三達尊), 녹야당(綠野堂)의 지위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구중궁궐에서는 공신에 봉하여 대려의 잊기 어려운 맹세를 돈독히 했고, 온 나라에서는 '아형(阿衡)만이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겠는가?'라는 감탄을 일으켰으니 참으로 그 나이가 높을수록 그 덕은 더욱
높다 하겠다. 우리 전하께서는 덕은 중윤(重輪)보다 더 뛰어나고, 뜻은 오로지 나라를 감독하는데
두었다. 그래서 어진 사람을 초치하는 북을 올리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는 깃발을 세워서 힘쓰고
노력하기를 급급하게 하면서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겼으니 마땅히 이런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이런 사람을 일컬어 말하게 되고 이런 사람을 성심으로 사모하게 된다는 것은 천하의 공언(公言)이니,
그 누가 이 일을 기뻐하지 않겠는가. 우리 폐하께선 사람은 오직 옛사람을 구하고, 착한 것은 반드시
따른다는 마음으로 기둥과 주춧돌 같은 대신(大臣)의 공로에 보답할 것을 기약해서 마침내 훌륭한
명을 내려서 상락군(上洛郡)에 봉하여 공(公)으로 삼으니 이는 후현(後賢)들의 길을 넓힌 것이다.
이것은 실로 천하의 공적인 장려이니, 그 누가 이 상(賞)을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공(公)이
오늘날 공(公)이 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요행으로 공(公)이 된 것과는 다르다. 대개 하늘은 사람이
원하는 바를 따라서 덕 있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이미 그 상수(上壽)를 주어서 그 몸을 편케
했으되, 뜻이 오히려 부족해서 또 상작(上爵)을 주어서 그 지위를 높게 해주었다. 원컨대, 공(公)은
하늘의 뜻을 받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순응해서, 그 분수를 편케 여겨서 영화를 누리소서. 앞에서
이른바 "만세의 뒤에 한 번 성인을 만나 그 견해를 안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삼가
고부(古賦)를 지어서 이름하여 『단모부(旦暮賦)』라 하고 멀리서 상락공 궤장(궤杖) 아래에 바칩니다.
그 사(辭)는 다음과 같다
성군(聖君)이 태어남이여!
풍운(風雲)의 길을 열고,
재상과 함께 조정에 진출(進出)함이여,
경위(經緯)를 도모했다.
타고난 충성심(忠誠心)을 다하여 삼한(三韓)을 도우고,
황비(荒肥)에 으뜸이 되매, 만민을 편안케 하였도다.
중조(中朝)에 조회를 가서 큰 공을 아뢰고,
동로(東路)에 길잡이가 됨이여, 도원수가 되었도다.
군사가 백만이 됨이여, 더욱 더 잘 다스렸고,
춘추가 80에 4년이 지났도다.
정신은 맑고 기운은 장대함이여, 몸은 기력이 강건하였네.
나이가 많고 덕이 높으니,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하도다.
중신(中宸)은 옛 일을 도모하는 뜻을 돈독히 하여 잊지 않고,
동궁(東宮)이 나라를 감독함이여! 태평정치를 아름답게 이루었도다.
후현들을 격려하기를 기약함이야,
포상하여 책봉하고, 개국공상락군(開國公上洛郡)으로 봉해 줌이여,
공(公)으로 은총을 내려주었다.
맏아들 영공(令公)은 월편(越篇)을 계승했고,
막내아들은 학사가 되어 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도다.
여러 손자들의 빛남이여,
뜰에 가득하고 손님들이 환호하며 왁자지껄함이여! 마을에 가득하도다.
어깨를 부딪히며 헌수하며 종종걸음치고,
길가는 사람들도 공(公)을 어질다 말하며 눈물을 흘리도다.
송나라 왕형공(王荊公)이 있음이여! 경륜을 양보하였고,
당나라 곽분양(郭汾陽)이 있음이여! 그 시작과 마침이 다소 부끄러웠다.
송축(頌祝)의 노래 소리는 조야(朝野)에 드날림이여!
장수(長壽)를 축원하고 미담이 어부와 초부에게도 미침이여,
성대한 일을 자랑하도다.
원숭이가 울고 학이 울음이여 환성으로 전송하고,
잣나무가 좋아하고 소나무도 기뻐하며 축하의 뜻을 베풀도다.
****
이승휴(李承休)
1224(고종 11)∼1300(충렬왕 26). 고려의 문신. 자는 휴휴(休休),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 경산부 가리현(京山府加利縣)사람으로 가리이씨(加利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12세에 원정국사(圓靜國師)의 방장(方丈)에 들어가 신서(申#서41)에게서 《좌전 左傳》과 《주역 周易》 등을 익혔으며, 125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다음해에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현(三陟縣)으로 갔다가 마침 몽고의 침략으로 길이 막히자, 그곳 두타산 구동(頭陀山龜洞)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263년(원종 4)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유천우(兪千遇)·원부(元傅)·허공(許珙)·박항(朴恒) 등에게 구관시(求官詩)를 지어 보내고, 다음해에 이장용과 유경의 천거를 받아 경흥부서기(慶興府書記)에 보임되었다.
1270년 삼별초가 봉기하였을 때에는 군수(軍需)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횡렴(橫斂)과 영선(營繕)으로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음을 들어 그 폐해를 극론(極論)하였으며, 1273년에는 식목록사(式目錄事)로 있으면서 당시 공이 없는 사람들이 관직에 초배(超拜)되는 것이 불가하다는 상소문을 초안하였다가 오히려 파직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에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 공으로 잡직령 겸 도병마녹사(雜職令兼都兵馬錄事)에 제수되었다.
다음해에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하여 또 한번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사행(使行)하였는데, 당시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호복(胡服)을 입고 장례를 치를 것을 염려하여 상복을 고려식으로 하도록 권유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우정언(右正言)이 되었으며, 이때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15개조로 나누어 간쟁하였다.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충청도안렴사(楊廣忠淸道按廉使)가 되어서는 장리(贓吏)7명을 탄핵하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가 원한을 사게 되어 곧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었는데, 이때부터 스스로를 동안거사라 하였다.
얼마 뒤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임명되었으나 1280년(충렬왕 6)감찰사의 관원들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삼척현의 구동으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당호(堂號)를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 歸去來辭〉에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하고, 여기서 《제왕운기》와 《내전록 內典錄》을 저술하였다.
또한, 만년에는 불교에 몰입하여 용안당을 간장사(看藏寺)로 고치고 토지를 희사하기도 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개혁정치를 추진할 때 특별히 기용되어 사림시독학사 좌간의대부 사관수찬관 지제고(詞林侍讀學士左諫議大夫史館修撰官知制誥)에 임명되었으며, 곧 사림시독학사 시비서감 좌간의대부(詞林侍讀學士試#비58書監左諫議大夫)를 거쳐 동첨자정원사 판비서시사 숭문관학사(同簽資政院事判#비58書寺事崇文館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70세가 넘어 현관(顯官)에 제수되는 것이 국가의 제도에 어긋남을 들어 거듭 사직을 요청하였고, 결국 같은해에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密直副使監察大夫詞林學士承旨)로 치사(致仕)하였다.
저작으로서 《제왕운기》가 있고, 아들 이연종(李衍宗)이 편집한 문집 《동안거사집 東安居士集》이 전하여지고 있다.
《제왕운기》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칠언시와 오언시로 엮은 서사시로서, 이승휴를 비롯한 당대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에 대해서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는 속에서 민족문화의 우월성과 역사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자주적인 역사서라는 것에서부터, 유교사관을 내세워 원나라에 대한 사대를 합리화하는 사대적·비자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 다양한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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