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충렬공 金方慶 34---부안 검모포 조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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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04 22:04 조회1,542회 댓글0건본문
자료 있는 곳 - http://byunsan.net/ → (왼쪽) 부안의 역사 → 진서와 검모포 → (오른쪽
위) (1)(2)(3)(4)
<(전북 부안) 진서면의 검모포>---------------------------------------
1999년 3월 20일 밤 8시 10분에 방영한 KBS1 텔레비전은 그 중후한 역사 스페셜
프로에서 "해상왕국 고려의 전함"이란 주제를 가지고 이 방면의 전문적인 연구자, 역사학자
와 고증의 자료들을 동원하여 다양하고도 구체적이며 과학적인 고증으로 재현 입증하면서
우리 나라가 통일신라 말기 장보고 이후 고려시대까지 한반도를 중심으로 서남 해상권을 지
배한 해상의 왕국이었음을 입증하여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 1274년(충선왕 1년) 10월 초에 여·몽(고려와 몽고)의 일본 정벌을 위한
동정연합군 3만여 명이 900여 척의 수송전함으로 일본 규슈의 하카타에 상륙하여 크게 무찔
렀으나 이른바 가미카제라는 태풍을 만나 패퇴하고 돌아왔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고려의 견
고하고 우수한 전함과 수송선 900여 척을 전라도 부안의 변산(邊山)에서 조선하였다는 사실
과 그 조선소가 지금의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구진마을을 중심으로 한 지역일 것으로 실증
방영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역사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몽고와 고려가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을 침공할 때 크고 작은 함선 900척, 대선
300척, 중형선 300척, 보급선 300척을 변산에서 조선하였다는 사실은 (고려사)제27권 원종
(元宗) 15년 갑술(甲戌)조에 자세히 밝혀져 있거니와 구체적으로 이들 전함을 조선한 조선
소가 어디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모든 여건으로 보아 진서면의 곰소 앞바다 검모포진 즉 구
진(舊鎭)마을을 중심으로 한 지역일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리고 900여 척이나 되는 방대한 규모의 물량과 고도의 조선 기술을 요하는 전함
들을 변산에서 조선하였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모든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어서 한 번쯤 이를 따져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고려 중기부터 압록강 건너 북방의 초원 거친 황야의 유목민 몽고족이 급속하게 강
성해지면서 중원(中原)을 휩쓸어 버리고 동남아와 중앙아시아 지방은 물론이요 멀리 유럽과
북구라파에 이르기까지 말발굽으로 뭉개 버리면서 역사상 가장 강대한 원나라를 건설한 13
세기 중엽, 고려는 원나라에 자주권을 내어주고 자기의 호흡마저도 제대로 못 쉬는 명맥만
의 국가로 전락하여 버렸다. 크고 작은 항몽(抗蒙)의 전투가 곳곳에서 있기는 하였지만 자주
권을 잃은 원나라의 한낱 부마국으로 전락하여 거의 한 세기를 그 발굽에서 벗어나지 못하
였다.
이때 유일하게 원나라에 거슬리며 고분고분하지 않은 나라가 바다 건너의 일본이었
다. 원나라 세조(世祖)는 고려를 향도자로하여 여러 차례 사신도 보내고 조서(임금의 명령을
적은 국서)를 일본에 보내어 회유하였지만 당시 일본의 신정권의 실력자 북조시종(北條時
宗)은 쿠빌라이의 오만한 조서와 태도에 강한 불만을 갖고 거절하곤 하였다.
이에 자존심과 체면이 크게 손상된 원(元)의 쿠빌라이는 일본 정벌을 결심하고 고
려를 발판의 거점으로 하여 여·몽 동정군을 편성하게 하고 전함과 수송선, 식량 모든 군사
물자를 고려로 하여금 준비하게 명령하였으며 거절할 수 없는 이 무리한 준비를 위하여 고
려의 고초는 극심하였다.
여·몽동정군의 수송전함 900여 척도 이렇게 하여 변산에서 조선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일본과 고려와의 관계는 썩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편도 아니어서 고
려 중기 이후에 일본의 몰락한 무인(武人) 집단이 해적으로 전락한 이른바 왜구들이 가끔
우리의 연안을 노략질함으로써 조정에서 일본 막부에 교섭하여 조용해졌으므로 일본을 침공
할 이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몽고의 침탈로 국력이 피폐하여 그럴 만한 여력도 없었다.
다만 몽고의 강압에 부득이 동조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고려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상을 지배한 해상왕국이었다고 주장하는 설은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통일 신라말 청해진 대사 무역왕 장보고에 의하여 이룩한 막강했던 해상지배권이
신라가 망하면서 많이 쇠퇴한 것은 사실이나 궁예의 신임을 받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
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신분과 배경을 보면 그 또한 수군 출신인 백선장군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 금성태수 융도 해상무역상이었다고 하니 고려가 건국된 후 왕건은 해상권
에 대하여 강화하였을 가능성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왕건은 수군을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가 진도를 점령하고 영산강을 거슬러
당시 내해적인 지형인 금성을 점령하고 견훤을 섬멸하는 교두보로 삼은 사람으로 해상무역
가의 아들이고 수군출신인 그가 바다에 대하여 해박하게 알며 관심 또한 깊었을 것임으로
해상정책에 소홀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고려시대의 해상정책이나 선박에 관한 자료는 별로 없다. 고려 인종
때(1123년)에 송나라 사신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다양한 문물을 보고 글과 그림으로
남긴 서경(徐競1091∼1153)의 "고려도경" 제33권 주즙(舟楫)조에 보면 당시의 배 4종류가 보
이는데 순선(巡船), 관선(官船), 송방(松舫), 막선(幕船)이며 함선(艦船)이나 과선(戈船) 등의
전함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여몽의 동정연합군이 제1차 일본침공을 하였을 때
약 3만 명의 연합군을 수송한 전함 9백여 척을 부안의 변산에서 건조하였다는 고려사의 기
록을 중심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여몽 연합군의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른다. 고려사의 충렬왕 즉위년 10월 초와 김방
경전에는 몽고군이 2만5천여 명에 고려군이 8천명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일본인 이케우찌의
심도 있는 연구서에 의하면 몽고군 2만 명에 고려군이 5천3백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사
제27권 원종(元宗 15년, 1274년)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갑술 15년 봄 정월에 원나라 총관 찰홀을 보내어 전함 3백 척의 조선을 감독하고
그 공장과 일꾼, 일체의 물건을 오로지 본국(고려)에 맡겨 부담케 하거늘 이에 문하시중 김
방경으로 동남도의 도독사를 삼았다]
원나라가 또 소용대장군 홍다구로 감독 조선관군민총관을 삼으니 다구가 정월 15일
로써 역사(役事) 일으키기를 약속하고 재촉이 심히 엄하거늘 왕이 추밀원부사 허공으로 전
주도지휘사를 삼고, 우복야 홍록주로 전라도 지휘사로 삼고, 또 대장군 나유를 전라도에, 김
백균을 경상도에, 박보를 동계에, 국자가업반부를 서해도에, 장군 임계를 교주도에 보내어
각각 부부사를 삼아 공장, 역도, 3만5백명을 징집하여 조선소에 나아가게 하니 때에 역기가
낙택하고 서무가 번극하여 기한이 급박하매 빠르기가 뇌전과 같으니 백성이 심히 괴로워하
였다.
이 고려사 기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제1차 일본정벌을 위한 준비로 수송 전함선의
건조를 전주도의 부안(당시는 보안현) 변산과 나주도의 천관산 등에 설치하도록 하고 그 감
독 책임자를 임명한 내용과 배를 만드는 목수와 그에 따른 일꾼 3만5백 명을 동원한 규모를
밝히고 있으며 일의 빠른 진첩을 위하여 독촉과 채찍이 얼마나 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기
록이다.
위의 내용 중 "전함 3백 척의 건조를 감독케 하거늘"의 3백 척은 실제로 전투에 임
하는 대선인 전함을 자칭한 것이고 전함을 건조하는 기술자인 공장(목수)과 일꾼들, 그리고
그에 따른 일체의 물자를 고려가 부담하도록 하여 고려의 목수들에 의하여 대선 300척, 보
급선 300척이 건조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대선의 크기가 실제로 얼마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일부 기록에
의하면 길이가 36보(35m 내외)라 하였으며 250톤 내지 280톤인 것으로 추정되므로 그 크기
가 상당하였으니 이와 같은 크기의 배를 수백 척 변산에서 건조하였다고 볼 때 그 엄청난
양의 목재 수요를 변산이 감당하였을까 싶지 않으며, 주변 고창, 정읍 등지에서도 보급이 되
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리고 변산과 천관산의 조선소에만 함선 건조의 책임자를 임명한 것이 아니라 각
도에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동남도, 경상도, 동계·서해도·교주도 등 전국의 각 도에
부부사를 임명하여 3만5백 명에 이르는 많은 목수와 인부를 징집하여 서둘러 조선소에 보급
하니 나라 안이 온통 들끓었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얼마나 급박하게 일을 다그쳤으면 "빠르기가 뇌전(번개)과 같았다"고 하였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잠시 앞의 고려사의 기록에 보이는 원나라의 감독조선관민총관 홍다
구(준기)와 도독인 김방경에 대하여 한마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정벌
주비의 총 책임자격인 홍다구라는 자는 원래 고려 사람으로 고려의 역신인 홍복원의 아들인
데 원나라와 싸울 때 그 아비가 항복하여 부자가 조국을 배반한 인물이다.
홍다구는 원나라에 충성을 다하면서 원나라를 등에 업고 고려 조정에 대하여 온갖
간섭을 다하고 괴롭혔으며 삼벌초의 난 평정과 일본정벌의 싸움에 김방경과 함께 참여하면
서 김방경을 모함하고 혹독한 고문을 가하는 등 귀양까지 보낸 인물이다.
김방경(1212∼1300)은 고려 후기의 명장이고 충신이다. 시호는 충렬이고 자는 본연
이며 안동인으로 어려서부터 뜻을 학문에 두어 소년 시절에 급제하였으나, 서북면병마판관
으로 있을 때 몽고군의 침입을 막아 싸운 이래 상장군이 되었으며, 진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고, 여몽동정연합군의 고려군 사령관으로 용맹을 떨친 충신
이다.
홍다구로부터 수차에 걸친 모함을 받고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하고 귀향까지 갔었
으나, 나라에 충성을 하는 일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자기 조국을 배반하고 그 조국을 괴롭힌
홍다구와 나라를 위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충성을 다한 김방경 장군, 한번쯤 비교하
여 봄도 뜻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의 빗발치는 독촉과 강압에 의하여 일본 정벌의 준비를 마친
고려 조정은 1274년에 대장군 나유를 원나라에 보내어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보고하는데, 나
유 장군이 원의 중서성(최고의 의정기관)에 서면으로 제출한 보고의 내용에 변산과 나주의
천관산에서 함선을 건조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년 정월 3일에 대선 300척을 타조하라는 조지(원의 명령)를 복몽하와 곧 그 조
치를 행하여 추밀원부사 허공을 전주도 변산에, 좌복야 홍녹주를 나주도 천관산에 보내어
재목을 준비하도록 하고, 또 시중 김방경으로 도독을 삼아 관하 원장을 다 정련하고 소용되
는 공장과 물자를 아울러 안팎에 준비토록 재촉하였나이다.
정월 15일에 이르러 모두 모여 16일부터 일을 시작하여 5월 그믐에 이르러 일을 마
치니 배는 대소를 아울려 900척을 완조하였고, 합용의 물자도 원활히 비축하였으므로 삼품
관의 능숙한 자로 하여금 회박을 분관케 하여 이미 금주(지금의 김해)로 향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제상국은 잘 부주하소서]
이때가 1274년 원종 15년인데 6월에 원종이 죽고 원나라에 반 볼모상태로 가 있던
세자 심이 돌아와 즉위하니 이분이 충렬왕이다.
그러니까 여몽이 동정연합군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일본을 침공한 것은 충렬왕 즉
위 초전인 1724년 10월 초이며 전라도 변산과 나주에서 건조된 수송함선이 김해에 집결하여
있다가 합포(지금의 마산)에서 나유 장군의 원나라 중서성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1274년
정월 3일에 원나라로부터 대선 300척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은 고려는 즉시 보안현의 변산
과 나주 천관산에 조선소를 설치하고 각기 책임자를 임명하여 정월 16일부터 일을 시작하여
900척에 이르는 큰 선단으로 불과 넉 달 만에 완조한 것이다. 일본을 향해 출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방경 장군을 감독으로 삼아 고려군의 장병들을 조련시키고 그에 따
른 공장,수수, 역부 등을 빈틈없이 동원시켰으며, 완성된 900척의 전함은 배를 능숙하게 잘
부리는 삼품관들로 하여금 운항 관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대규모의 전함들은 어떤 이유로 변산에서 건조하였으며, 변산의
어디에 조선소를 설치하고 배를 건조하였을까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조선소를 구체적으로 어디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그 정확한 장소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당시의 모든 여건이나 정황으로 보아 보안현의 검모포(지금의 곰소 앞바다)
에 있었던 검모포 진영(수군의 기지)이 있었던 지금의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곰소 동편의
구진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검모진포는 서해의 서남 연안을 지키는 수군의 요충지로 수군의 진영이 되었다. 동
지여지승람(동국여지승람이 아닐까요?) 34권 부안현의 관망조에 검모포 진영의 기록이 보인
다.
"현의 남쪽 51리에 있다. 수군 만호1명이다"라 하였다.
검모진영은 구진마을에 있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에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겠다.
검모포 진영이 있었던 구진마을이 당시 배를 만든 조선소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데는 이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의 근거가 있다.
첫째, 당시 변산은 행정적으로도 보안현에 속해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려사
57권 지리 보안현 조에도 명확하다.(...별호를 낭주:浪州)라고 한다. 변산이 있고(위도가 있
다)라 하였다.
둘째, 변산반도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 지형적인 여건으로 보아 조선소를 설치하기
에 검모진포만한 곳이 없다. 고창의 선운산 자락과 변산 자락 사이에 넓고 길다란 만(灣)을
이루어 항시 잔잔한 물결과 깊은 수심, 그리고 널찍한 뻘판이 있다.
셋째, 수군의 진영이 있는 곳이어서 함선을 건조하는 장소로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깊으며 관에서 하는 일을 추진하기에도 매우 편리하였을 것이다.
다섯째,(원문에 일부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검모포진영의 주변은 문물이 매우 활
발하게 형성된 지역이라는 점이다. 12·13세기의 우리 나라 도자기 공예의 찬란한 문화를
피어나게 한 곳도 검모포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 연안이었다.
세계적인 명품 상감청자도 검모포 연안에서 구웠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문물의 발
달이 활발하였던 곳은 부령현이 아니라 보안현이었으며, 그 중심이 되었던 곳이 검모포 지
역이었다. 그리고 줄포항이 점차 매몰되어 가자 1938년에 구진마을 바로 옆의 곰섬과 범섬
을 인공적으로 매립 연결하여 곰소항을 개설하였는데 이때 매립공사를 하면서 검모포진영이
있었던 구진마을 입구의 갯벌 속에서 수백 년 동안 바다 뻘 속에 묻혔던 아름드리 못탕목이
수없이 발굴되었는데 이 못탕목 일부가 지금도 구진마을에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못탕목은 배를 건조할 때 밑에 까는 깔이목으로 이 못탕목 위에서 배를 건조한다.
변산과 나주의 천관산에서 건조된 900여 척의 함선에 몽고군 2만여 명, 고려군 5천3백여명
으로 연합군을 편성한 여·몽정벌군은 1274년 10월 초에 합포(지금의 마산)를 출발, 곧바로
대마도와 일지도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일거에 무찌르고 규수의 비전국, 축전국 등을 점령
크게 분전하였으나 마침 큰 태풍을 만나 많은 전함과 병사를 잃고 철수하여 합포로 돌아오
니 죽은 자가 1만3,500여명에 이르렀다. 이것이 여·몽연합군의 제1차 일본침공이다.
고려왕의 호소에도 불고하고 원의 세조( 쿠비라이)는 일본침공을 포기하지 않고 계
속하여 고려로 하여금 전함, 군수물자 등을 준비하도록 명하였는데 이후 일본은 더욱 완강
하여져 두 차례나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죽이고 규수의 하카다에 몽고방누의 성벽을 쌓
는 등 대비하였다. 그 후 충렬왕 7년, 즉 1281년 5월에 다시 편성된 여·몽연합군인 동로군
은 중국 남쪽의 만족으로 편성된 강남군까지 합하여 10만여의 대병으로 제2차 일본정벌에
나섰는데 이때도 고려에서 병선 900여 척, 초공 수수(배를 운항하는 인부) 1만5천여 명, 정
군 1만 명에 군량곡 11만 석을 부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 병선은 그 건조한 곳을 밝
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역시 변산과 나주에서 건조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제2차의 일본침공도 일본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60여 일을 싸웠으나 7월 1일 또
태풍이 내습하여 전함과 병사의 대부분을 잃고 돌아오니 고려인은 2만7,250명 중 생환자는
1만9,397명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일본침공 연합군의 수송함대의 선박을
건조한 구체적인 장소로는 당시 보안현 변산의 검모포진영이 있었던 구진마을이었을 것으로
보고 이 구진마을의 변천하여 온 연혁을 좀더 밝혀 보기로 한다.
구진은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로 면사무소가 있는 곰소로부터 동쪽으로 1.5km쯤의
바닷가 마을이다. 검모포가 서남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여서 이곳에 수군의 진영인 검모포진
영이 설치되면서부터 진영마을로 생성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데 이렇게 본다면 마을의 시
초는 백제 때부터가 아닌가 여겨진다.
마을 뒤에 작은 동산을 배산으로 검모포 앞바다를 향하고 배산임수형의 남향마을을
이루고 40여 호에 인구 109여 명인데 지금은 어업보다는 농업이 주업된 마을이다. 마을 뒷
동산 중턱에 남향으로 옛 진영의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그 뒤로 석누를 쌓은 성벽의 자취가
지금도 완연하다.
진영터의 동편으로 수백 년 된 몇 아름드리 느티나무당산 신목이 용줄을 밑둥에 감
고 마을을 굽어보며 수호하고 있음이 인상적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부안현의 관방조에 "관방
일검모포병선박입"이라 하였으니 수군들의 진영이었음을 밝힌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구진의 연혁을 밝혀보자. 구진마을에 천여 년 이상 있어 왔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검모포진영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1812년에 진영을 지금
의 진서리초등학교 자리로 옮겼으며 만호 1인, 수구의 정원 830명에 병선이 두 척이었다고
전한다.
수군 830명이란 정원이 그러하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그 절반도 확보하지 못한 것으
로 알려졌다. 1887년에 간행된 부안지의 관방조에 의하면 "검모포영:재현남 51리 수군만호 1
인 당우계유혁파"라 하였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진서면 구진부락에 왔던 검모포진 수군의 진영은 1812년에
진서리로 옮겨가 1873년(고종 10년)에 혁파(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영이라는
기관이 옮겨짐으로 해서 새로운 지명이 생겨났는데 새로 진영이 옮겨진 곳의 이름은 신진리
(新鎭里) 또는 진의 서쪽마을이란 뜻의 진서리(鎭西里)라 하고, 옛 진영터의 마을은 구진리
(舊鎭里)라 부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진서면(鎭西面)이란 면의 이름도 검모포진(黔毛浦鎭)
에서 유래된 역사 문화적인 내용이 담겨진 화석(化石)된 명칭이다.
이와 같이 진서면 구진마을은 고려시대 이래로 우리 나라 서해를 지키는 요충지의
진영(鎭營)의 마을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여·몽동정연합군 수송선단의 수백 척에 이르는 배
를 건조한 조선소의 마을이었으며, 고려말 우왕(禑王) 초에는 일본 해적 왜구들이 50척으로
내습하여 와 구진의 검모포진을 점령한 후 적현(호벌치)을 넘어 부령현까지 점령하고 동진
교를 헐어 버린 왜구의 난을 가장 심하게 겪은 마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오늘 구진마을은 화석(化石)하여 버린 부안역사 문화의 일부를 간직한 채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한낱 구진(舊鎭)마을로만 남아 있어 안타깝다. 정말로
이 고장의 역사,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고장의 문화를 바르게 정립하려 한다면
겉치레 낯내기 문화행사, 푸석하고 알맹이 없는 홍보적 행사는 이제 그만두고 구진마을 같
은 (역사의 현장마을) 하나라도 찾아 그 입구에 마을 연혁비라도 세우는 것이 우리들의 가
슴에 향토문화를 채워주는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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