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충렬공 金方慶 35---장흥 천관산 조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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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04 22:06 조회1,398회 댓글0건본문
고려사 (원종 15년 6월)
대장군 나유를 원나라에 보내어
“금년 정월 3일에 귀국 조정의 지시를 받고 즉시 큰 배 300척을
만들도록 조치를 취하여 추밀원 부사 허공을 전주도 변산에,
좌복사 홍록주를 나주도 천관산에 파견하여 재목을 준비하게 하였다.
또 시중 ●김방경을 도독사로 임명하고, 그가 관할하는 관원과 장령들도
모두 우수한 인재들로 뽑았으며, 필요한 인부와 장인, 자재들도
모두 국내 각지에 사람을 파견하여 재촉·보장하도록 하였다.
그 후 정월 15일에 이를 모두 모아 16일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5월 그믐에
이르러 완료했음을 보고하므로 큰 배와 작은 배를 합해 900척을 완공하고,
사용할 물건들도 모두 원만히 구비되었기에 3품관 중에서 유능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맡게 하여 뱃머리를 돌려 이미 금주로 떠나게 하였다.
여러 재상들은 황제에게 잘 보고하여 주기 바란다”
는 글을 중서성에 보냈다.
遣大將軍羅裕如元 上中書省書曰 今年正月三日伏蒙朝旨 打造大船三百?卽行措置 遣樞密院副使許珙於全州道邊山 左僕射洪祿?於羅州道天冠山備材 又以侍中金方慶爲都督使 管下員將亦皆精揀 所須?匠物件?於中外 差委催督應副 越正月十五日聚齊 十六日起役 至五月晦告畢 船大小幷九百隻造訖 合用物件亦皆圓備 令三品官能幹者 分管廻泊已向金州 伏望諸相國善爲敷奏(『고려사』 27, 세가 27, 원종 15년 6월조).
■ 작성자 :태영/문 작성일 : 2002/08/05 14:49 (from:218.53.206.218) 조회 : 88
[갑술 15년 봄 정월에 원나라 총관 찰홀을 보내어 전함 3백 척의 조선을 감독하고
그 공장과 일꾼, 일체의 물건을 오로지 본국(고려)에 맡겨 부담케 하거늘 이에 문하시중 김
방경으로 동남도의 도독사를 삼았다]
원나라가 또 소용대장군 홍다구로 감독 조선관군민총관을 삼으니 다구가 정월 15일
로써 역사(役事) 일으키기를 약속하고 재촉이 심히 엄하거늘 왕이 추밀원부사 허공으로 전
주도지휘사를 삼고, 우복야 홍록주로 전라도 지휘사로 삼고, 또 대장군 나유를 전라도에, 김
백균을 경상도에, 박보를 동계에, 국자가업반부를 서해도에, 장군 임계를 교주도에 보내어
각각 부부사를 삼아 공장, 역도, 3만5백명을 징집하여 조선소에 나아가게 하니 때에 역기가
낙택하고 서무가 번극하여 기한이 급박하매 빠르기가 뇌전과 같으니 백성이 심히 괴로워하
였다.
이 고려사 기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제1차 일본정벌을 위한 준비로 수송 전함선의
건조를 전주도의 부안(당시는 보안현) 변산과 나주도의 천관산 등에 설치하도록 하고 그 감
독 책임자를 임명한 내용과 배를 만드는 목수와 그에 따른 일꾼 3만5백 명을 동원한 규모를
밝히고 있으며 일의 빠른 진첩을 위하여 독촉과 채찍이 얼마나 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기
록이다.
위의 내용 중 "전함 3백 척의 건조를 감독케 하거늘"의 3백 척은 실제로 전투에 임
하는 대선인 전함을 자칭한 것이고 전함을 건조하는 기술자인 공장(목수)과 일꾼들, 그리고
그에 따른 일체의 물자를 고려가 부담하도록 하여 고려의 목수들에 의하여 대선 300척, 보
급선 300척이 건조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대선의 크기가 실제로 얼마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일부 기록에
의하면 길이가 36보(35m 내외)라 하였으며 250톤 내지 280톤인 것으로 추정되므로 그 크기
가 상당하였으니 이와 같은 크기의 배를 수백 척 변산에서 건조하였다고 볼 때 그 엄청난
양의 목재 수요를 변산이 감당하였을까 싶지 않으며, 주변 고창, 정읍 등지에서도 보급이 되
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리고 변산과 천관산의 조선소에만 함선 건조의 책임자를 임명한 것이 아니라 각
도에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동남도, 경상도, 동계·서해도·교주도 등 전국의 각 도에
부부사를 임명하여 3만5백 명에 이르는 많은 목수와 인부를 징집하여 서둘러 조선소에 보급
하니 나라 안이 온통 들끓었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얼마나 급박하게 일을 다그쳤으면 "빠르기가 뇌전(번개)과 같았다"고 하였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잠시 앞의 고려사의 기록에 보이는 원나라의 감독조선관민총관 홍다
구(준기)와 도독인 ●김방경에 대하여 한마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정벌
주비의 총 책임자격인 홍다구라는 자는 원래 고려 사람으로 고려의 역신인 홍복원의 아들인
데 원나라와 싸울 때 그 아비가 항복하여 부자가 조국을 배반한 인물이다.
홍다구는 원나라에 충성을 다하면서 원나라를 등에 업고 고려 조정에 대하여 온갖
간섭을 다하고 괴롭혔으며 삼벌초의 난 평정과 일본정벌의 싸움에 ●김방경과 함께 참여하면
서 ●김방경을 모함하고 혹독한 고문을 가하는 등 귀양까지 보낸 인물이다.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의 빗발치는 독촉과 강압에 의하여 일본 정벌의 준비를 마친
고려 조정은 1274년에 대장군 나유를 원나라에 보내어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보고하는데, 나
유 장군이 원의 중서성(최고의 의정기관)에 서면으로 제출한 보고의 내용에 변산과 나주의
천관산에서 함선을 건조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년 정월 3일에 대선 300척을 타조하라는 조지(원의 명령)를 복몽하와 곧 그 조
치를 행하여 추밀원부사 허공을 전주도 변산에, 좌복야 홍녹주를 나주도 천관산에 보내어
재목을 준비하도록 하고, 또 시중 ●김방경으로 도독을 삼아 관하 원장을 다 정련하고 소용되
는 공장과 물자를 아울러 안팎에 준비토록 재촉하였나이다.
정월 15일에 이르러 모두 모여 16일부터 일을 시작하여 5월 그믐에 이르러 일을 마
치니 배는 대소를 아울려 900척을 완조하였고, 합용의 물자도 원활히 비축하였으므로 삼품
관의 능숙한 자로 하여금 회박을 분관케 하여 이미 금주(지금의 김해)로 향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제상국은 잘 부주하소서]
이때가 1274년 원종 15년인데 6월에 원종이 죽고 원나라에 반 볼모상태로 가 있던
세자 심이 돌아와 즉위하니 이분이 충렬왕이다.
그러니까 여몽이 동정연합군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일본을 침공한 것은 충렬왕 즉
위 초전인 1724년 10월 초이며 전라도 변산과 나주에서 건조된 수송함선이 김해에 집결하여
있다가 합포(지금의 마산)에서 나유 장군의 원나라 중서성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1274년
정월 3일에 원나라로부터 대선 300척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은 고려는 즉시 보안현의 변산
과 나주 천관산에 조선소를 설치하고 각기 책임자를 임명하여 정월 16일부터 일을 시작하여
900척에 이르는 큰 선단으로 불과 넉 달 만에 완조한 것이다. 일본을 향해 출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방경 장군을 감독으로 삼아 고려군의 장병들을 조련시키고 그에 따
른 공장,수수, 역부 등을 빈틈없이 동원시켰으며, 완성된 900척의 전함은 배를 능숙하게 잘
부리는 삼품관들로 하여금 운항 관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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