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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43---高麗 백성들의 무거운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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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06 23:26 조회1,5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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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高麗 백성들의 무거운 짐

1273년 5월, 최후의 일본 초유사 趙良弼이 귀국함으로써 쿠빌라이는 일본의 의사를 거듭 확인했다. 쿠빌라이는 제주도의 三別抄를 평정한 뒤 開京으로 개선한 장수들을 元(몽골)의 大都(北京)에 소집, 회의를 열고 일본 정벌을 명했다.

원정군의 지휘부는 ♥都(흔도)·洪茶丘(홍다구)·劉復亨(유복형) 및 고려의 장수 ★金方慶의 4인으로 구성되었다. 총사령관은 ♥都. 홍다구와 유복형은 右副元帥와 左副元帥였다. 고려군을 이끄는 ★金方慶에게는 丞相(승상) 다음의 지위인 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라는 작위가 수여되었다. 개부의동삼사라면 일찍이 신라·백제·고구려 임금들이 隋·唐의 황제로부터 받은 작위이다.

★金方慶은 황제로부터 『拔群(발군)의 戰功을 바란다』는 격려와 金製 안장과 綵服(채복: 비단옷)을 받고 귀국했지만, 그 마음을 결코 밝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대해 병사 8000명, 뱃사공·水夫 1만5000명을 차출하도록 명했기 때문이다.

40여 년에 걸친 몽골군의 침략, 3년에 걸친 삼별초의 반란으로 고려는 황폐화해 있었다. 고려 백성들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 국왕 元宗은 쿠빌라이에게 간청하여, 동원병력을 병사 6000명, 뱃사공·水夫 6700명으로 하향조정했다.

이러한 일본 원정의 전략을 세운 쿠빌라이는 2만 명의 自國兵을 동원했다. 그중 5000명은 高麗에 주둔하던 屯田兵(둔전병)이었고, 나머지는 신규로 징발한 몽골족·여진족·漢族의 장병들이었다. 이밖에 수천 명의 뱃사공·水夫도 따로 징발되었다. 여기에 고려군과 합치면 4만 명에 가까운 병력이었다. 그들은 1274년 5월부터 잇달아 고려의 合浦에 도착, 그 일대에 집결했다.

드디어 洪茶丘가 高麗의 工匠(공장)·役夫(역부) 3만여 명을 무자비하게 닥달해서 건조한 군함 900척도 合浦에 집결했다. 출정의 시기가 7월로 정해졌다.

그런데 그 출정을 앞둔 6월 중순에 高麗 국왕 元宗이 재위 15년에 타개했다. 元의 大都에서 세자 諶(심)과 황녀 쿠츠르가이미시(쿠빌라이의 딸인 齊國大長公主)의 결혼식이 거행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세자 諶(忠烈王)의 즉위식전과 元宗의 服喪(복상)이 잇달아 거행되는 바람에 출정의 시기가 연기되었다. 원정군이 合浦를 출항한 것은 元宗의 유해가 開京 교외 소릉에 안장된 9월12일의 다음 달, 즉 1274년 10월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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