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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42---武士의 悲壯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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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06 23:24 조회1,7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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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武士의 悲壯美

助國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진두에서 용전했지만, 그것은 螳螂拒轍(당랑거철: 사마귀가 수레 앞을 막아 섬)이었다. 敗할줄 뻔히 알고도 회피하지 않고 출진한 것이라면 그건 책임감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는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武士의 역할」을 완수했다.

「對馬島史」에는 연합군의 主力은 對馬 중앙부 아소우(淺茅)灣에 집결, 그 일부가 코모다에 내습했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코모다 이외에 對馬의 주요 거점들인 히타카츠(比田勝), 미네우라(三根浦), 카시우라(加志浦) 등지에도 상륙, 거기서도 在地武士들과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골군은 이후 열흘 가까이 對馬島에 머물며 약탈을 감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투의 끝머리란 으레 그러한 것― 더구나 勝者가 악명 높은 몽골軍임에랴…. 살아남은 주민들은 모두 깊은 산 속으로 피난했을 터이었다.

지금의 코모다는 필자가 이제껏 방문했던 일본의 浦口들 가운데 가장 쓸쓸하고 가난한 곳이란 느낌을 받았다. 「對馬島의 젖줄」이었던 한반도와 가까운 코모다―帆船(범선)시대엔 휘영하게 번영했을 것이다. 코모다 해변의 古戰場을 걸었다. 해변에는 宗助國을 모시는 「코모다하마 神社」가 쇠락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필자는 자기 나라를 지키려다 전몰한 宗助國의 石碑(석비) 앞에서 敬意를 표했다.

神社로부터 약 200m 정도 남방의 해안에는 宗助國의 부하인 사이토 스케사다(齊藤資定)라는 勇士가 분전하다가 최후엔 스스로 자기 머리를 바위에 쳐박아 죽었다는 현장도 표시되어 있다. 勇士의 최후란 이처럼 東西古今과 彼我(피아)를 막론하고 悲壯美(비장미)가 있다.

이곳 사스가와(佐須川)를 따라 내륙부로 들어가면 「카시네」라는 작은 마을 있다. 이곳 法淸寺에는 助國의 「胴塚」(동총)이 있다. 목 없는 몸만 묻었던 무덤이다.

이즈하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카미자카(上見坂) 전망대에 올랐다. 여기서 내려다본 아소우(淺茅)灣은 일본 최고의 절경으로 손꼽힌다. 육지의 침강에 의해 생성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 그 돌출부들이 문어발처럼 얽히고설켜 일대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 麗蒙연합군의 大함대가 정박했다. 아소우만을 경계로 對馬島는 윗섬과 아랫섬으로 나눠진다.

對馬島까지 와서 百濟人(백제인)들이 만든 일본 最古의 성터인 카네타노키(金田城)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지에서 「朝鮮式山城」으로도 불리고 있는 이 城은 663년 백제부흥군-倭軍의 연합군이 白村江(지금의 금강) 전투에서 羅唐연합군에게 패전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百濟 유민들과 왜인들이 羅唐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667년에 축조한 것이다. 성벽은 높이 2∼5m, 길이 5.4km. 이후 金田城은 大陸의 동향을 살피는 日本의 최전선 기지로 활용되었다.

카네타山城은 對馬공항에서 코모다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필자는 코모다에 들어서기 전에 택시를 잠시 세워놓고 카네타山城의 성돌이 빤히 보이는 지점까지 올랐다가 갈 길이 바빠 下山했다. 대마공항-카네타城-이즈하라 중심가 코스를 일주한 후 필자가 지불한 택시요금은 1만5080엔이었다.

對馬島를 정복한 연합군은 이즈하라港 등지에서 약 열흘간 휴식을 취한 후 다음 공격목표인 이키시마(壹岐島)로 진발한다. 여기서 잠깐,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바로, 몽골(大元)의 황제 쿠빌라이는 왜 日本원정을 감행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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