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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49---麗蒙연합군의 하카타港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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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06 23:36 조회1,7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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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麗蒙연합군의 하카타港 습격

1274년 10월17일, 麗蒙연합군은 다카시마(鷹島)로 침입, 이 섬의 阿翁과 船黨津의 해안으로부터 상륙했다. 한편 松浦黨의 무사들도 다카시마의 殿浦에 상륙, 남방의 곶(岬)에 日本山城을 구축하여 내습하는 麗蒙연합군에 항전했지만,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전황은 갈수록 일본군에게 불리했다. 松浦黨 무사를 비롯한 규슈의 御家人(고케닌: 가마쿠라 막부의 직속 무사)들은 크게 분전했지만, 日本 騎馬무사의 개인전법에 대한 연합군의 집단전법, 그리고 당시 일본인으로선 상상하지도 못한 鐵砲(몽골語로 「데츠하우」라고 발음함)의 위력에 압도당했던 것이다.

특히 다카시마 해역은 제2차 원정 때의 主戰場이었다. 지금도 다카시마 해역에선 麗蒙연합군의 유품이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다. 다카시마역사민속박물관과 倂設(병설)된 매장문화재센터에선 현재 엄청난 수의 발굴유물을 보존처리·분류·연구하고 있다. 그곳은 水中고고학의 「천국」이었다. 발굴유물에 관해서는 이 기사의 순서 때문에 다음 2월호에 소개할 것이다.

麗蒙연합군은 이어 大宰府 공략을 위해 하카타灣으로 진격한다. 연합군 함대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玄界島(겐카이도)의 西水道를 거쳐, 하카타灣에 그대로 침입했다. 6차례의 蒙使 파견, 특히 두 번에 걸친 趙良弼의 장기체재에 의해 규슈의 지리·풍속 등을 사전에 탐지해 두었기 때문인 것 같다.

10월19일, 우선 일부 병력은 하카타灣의 서부 해안 이마쓰(今津)에 拔都魯輕疾舟를 대고 상륙하여 외곽에 거점을 확보했다. 다음날인 10월20일, 여명과 함께 하카타灣의 중앙부인 早良川(사와라가와) 河口인 모모치바라(百道原), 이키노하마(지금의 오키노하마), 하코자키(箱崎)해안 등 3개 방면에서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전개된다.

大宰府의 총사령관 츠네쓰케(少貳經資)는 對馬島의 전령 小太郞 및 兵衛次郞, 그리고 이키島로부터 달려온 宗三郞의 보고에 의해 麗蒙연합군의 내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가마쿠라(鎌倉)막부와 교토(京都)의 로쿠하라단타이(六波羅探題)에 急使(급사)를 날렸다. 로쿠하라단타이는 가마쿠라 幕府의 京都 조정에 대한 감시기관이다.

츠네쓰케는 또 규슈 管內의 슈코(守護: 지방장관)·지토우(地頭: 고을원)를 비롯한 고케닌(御家人: 막부 직속 무사)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원래부터 御家人(막부의 직할 무사)들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즉각 하카타灣으로 집결, 미리 정해진 대로 각 부서에 착임했다.

하카타 지구에는 前線사령관이며 츠네쓰케의 동생인 쇼니 케이쓰케(少貳景資)가 지휘하는 주력부대가 배속되었다.

그 병력은 守護인 少貳·오토모(大友)·시마즈(島津)씨의 각 隊가 500騎씩이었고, 각 地頭·御家人의 평균병력이 125騎, 그 地頭·御家人의 수는 31家였기 때문에 합계 3875騎. 여기에 守護 3家의 1500騎를 더하면 총계 5375騎였다. 이는 일본 측 사료 「元寇紀略」(원구기략)에 기록된 숫자이다.

다음은 역시 일본 측 사료 「本土防衛戰史」에 기록된 하카타 방어전의 모습이다.

10월19일 이마쓰(今津) 해안에 상륙한 몽골군 支隊는 이마쓰의 監視隊를 밀어내고 포진, 그 일부가 다음날 하카타灣 중앙부인 모모치(百道) 해변에 상륙할 主力軍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東進하여, 모모치하마의 남방 소하라(祖原)山을 점거했다. 그때 祖原지구의 방어를 책임진 것은 하라다(原田) 一族과 마쓰우라(松浦)黨이었는데, 몽골군의 集團戰法과 新兵器의 위력 앞에 무참히 패퇴했다. 지금은 공원화한 소하라山에는 「元寇戰跡」碑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 麗蒙연합군의 本陣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10월20일, 드디어 ★金方慶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메이노하마(姪浜) 앞 小戶海峽을 항행하여, 여명과 더불어 사와라가와(早良川) 河口인 모모치바라(百道原)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早良川의 지금 이름은 무로미가와(室見川)이다.

고려軍이 상륙한 지점에는 현재 초현대식 건물 「후쿠오카(福岡) 타워」(높이 123m에 전망대가 있음)가 들어서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일본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그 바로 남쪽에는 후쿠오카 박물관, 동쪽엔 일본 프로야구단의 하나인 「다이에 호크스」의 홈그라운드인 「후쿠오카 돔」이 이웃해 있다.

필자는 후쿠오카 취재 첫날인 11월28일 오후, 맨 먼저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후쿠오카 타워」의 전망대로 올라갔다(입장료 800엔). 여기에 오르기만 하면 후쿠오카 全지역이 一目瞭然(일목요연)할 뿐만 아니라 730년 前 하카타 상륙작전의 모습이 파마노라마처럼 연상된다.

하카타 地區 前線사령관인 카게쓰케(景資)는 고려軍의 상륙작전을 보고 아카자카(赤坂)지구를 맡고 있던 菊池武房에 출격을 명했다. 그럴 때 소하라(祖原)山을 점거하고 있던 몽골軍 부대가 고려軍의 상륙부대를 엄호하는 가운데 격전이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軍은 白道原을 완전히 확보하고 東進하여 현재 후쿠오카의 중심부인 鳥飼·別府·赤坂를 강습했다. 하카타의 이키노하마 앞바다로 침입한 몽골軍의 主力도 이키노하마와 하코자키(箱崎)에 상륙하여 少貳·大友·島津의 부대를 패퇴시켰다. 이로써 일본군 측의 하카타灣 해안방위선 30km가 모두 붕괴되었다.

그때까지의 전황에 대해 高麗史에는 다음과 기록되어 있다.

<壹岐島에 이르러 1000여 명을 죽이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니 倭人이 퇴각 도주하였는데, 죽어 넘어진 시체가 삼대 쓰러진 것처럼 많았으며, 날이 저물 무렵에 포위를 해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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