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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50---몽골군의 新戰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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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06 23:40 조회1,7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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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몽골군의 新戰法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20일의 하카타의 하코자키 지구 전투에서는 상륙한 麗蒙연합군을 島津久經의 부대가 용감하게 맞싸웠고, 하카타의 이키노하마의 전투에서도 少貳景資(經資의 동생으로 前線사령관)의 부대는 노도와 같이 몰려오는 몽골군에게 밀리면서도 힘껏 항전했다. 그는 스스로 長弓을 쏘아 몽골군의 副元帥(부원수)를 馬上으로부터 추락시켰다. 다음은 「八幡愚童記」 관련 기록이다.

<少貳景資는 부하들과 함께 力戰했으나 불리하여 퇴각하고 있던 바, 키 7척, 수염을 배꼽 부근까지 늘어뜨린 푸른 갑옷의 대장이 葦毛(위모: 갈대처럼 생긴 털)의 말에 올라 14, 15騎와 80人의 잡병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景資는 馬術의 명수였기 때문에 퇴각하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長弓에 화살을 먹여 쏘았는데, 그 화살은 선두로 달려오는 대장의 胸板(흉판)에 꽂혀 대장이 낙마했다. (中略) 주인을 떨어 뜨린 葦毛의 말은 金覆輪(금복륜)의 안장만 붙어 있는 상태로 (戰場에서) 돌아다녔는데, 후에 그 말의 주인의 이름을 물었더니 그것은 征東左副元首(정동좌부원수) 劉復亨이었다>

「八幡愚童記」는 국난 극복의 상황을 愚童(어리석은 아이)도 알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저술한 古書인 만큼 일본 무사들의 滅私奉公(멸사봉공)과 「神國日本」에 대한 神佛의 加護(가호)를 유별나게 강조하여 신빙성이 좀 떨어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전투장면과 彼我의 力量관계 등을 놀랄 만큼 리얼하게 서술하고 있어 後世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하카타灣岸에 있어서 양군의 主力戰은 10월20일 새벽부터 일몰까지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 있어서 일본군은 그 편성·장비·전투법의 어느 면에 있어서도 연합군보다 열등했다. 다음은 「八幡愚童記」의 기록이다.

<몽골은 太鼓와 징을 두들겨 신호했는데, 그 소리가 엄청났다. 일본 말들은 모두 이에 놀라 미쳐 날뛰었는데, 그렇게 허둥대는 바람에 적의 화살을 맞았다. 몽골의 화살은 짧았지만, 화살촉에 毒을 발라 맞으면 중상을 당했다. 몽골군은 수백인이 矢先(시선)을 정렬하여 화살을 비오듯 쏘는 데다 창이 길고, 갑옷도 빈틈이 없었다. 전투대형을 갖추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 오면 중앙을 열어 몰아넣은 다음에 兩端(양단)으로 포위하여 무찔렀다. 갑옷은 가볍고 말도 잘 탄다. 힘도 강하다. (中略) 豪勢勇猛自在(호세용맹자재)하기 짝이 없고, 임기응변의 진퇴에 능하다.

대장은 高地에 올라 (형세를 관망하고) 太鼓를 쳐서 부대를 생각대로 진퇴시킨다. 특히 물러날 때는 (적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鐵砲(철포)의 鐵丸(철환)을 발사한다. 명중하면 사방에 화염과 연기가 치솟아 주위를 덮어 버린다. 또 그 소리, 우레와 같아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이런 전술 때문에 일본군의 장병들은 魂魄(혼백)이 빠져 방향감각조차 잃어 버리고 말았다. 소바라로부터 赤坂에 이르는 戰場에서는 鳥飼瀉 부근이 습지대였던 것이 일본군에겐 다행스러워 한동안 연합군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카타 지구에서는 少貳·島津 부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일거에 동남방이 뚫렸다. 몽골군은 奉行所를 습격, 하카타町의 민가와 氏神을 모신 쿠시다(櫛田: 즐전)神社를 불태웠다.

특히 大友賴泰가 수비하고 있던 하코자키(箱崎)지구가 뚫리자 鎭西軍 전체가 大宰府의 최종 防衛라인인 미즈키(水城: 수성)로 퇴각했다. 이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의 무사들이 최고로 숭배하던 武神을 모신 신사 ♥崎宮(거기궁: 하코자키구우)이 兵火로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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