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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51---몽골군이 돌연 하카타灣으로부터 사라진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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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06 23:42 조회1,5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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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몽골군이 돌연 하카타灣으로부터 사라진 까닭

10월20일 밤, 연합군은 勝勢에도 불구하고 陸上 교두보에서 野營하지 않고 상륙정 拔都魯輕疾舟를 타고 하카타灣에 떠 있던 군함 千料舟로 물러났다. 육지에서 宿營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군이 장기로 삼는 夜襲(야습)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귀함 후 연합군 수뇌부는 전투를 계속할 것인가의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作戰會議(작전회의)를 열었다. 「東國通鑑(동국통감)」과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는 이 논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忽敦(홀돈=흔도)가 말하기를 『우리 軍勢는 전투엔 習熟(습숙)하고 있지만, 종일 싸워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무기를 거두었다. 내일도 또 전투를 할 것인가』라고 했다.

★金方慶이 말하기를, 『우리 兵들이 이미 敵陣에 침입해서 잘 싸우고 있어 「지금부터 一步」라는 상황에 있다. 옛날 秦(진)의 명장 孟明(맹명)은 (상륙 후에) 스스로 (타고 온) 배를 불태웠고, 漢의 淮陰侯 韓信(회음후 한신)은 背水陣(배수진)으로 싸워 승리를 쟁취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 故事에 따라 決戰을 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했다.

이에 忽敦이 말하기를, 疲兵(피병: 피로한 병사)을 가지고 大敵과 싸우더라도 完勝을 얻지 못할 것이니 물러서는 것이 좋다』고 했다 >

高麗의 사령관 ★金方慶은 하카타 교두보에서 野營한 뒤 다음날 일본군과 決戰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총사령관 ♥都와 右副元首(우부원수) 洪茶丘는 이 이상 싸워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지지 않을 것이니 만큼 철병해야 할 것이라고 거부했던 것이다.

일본 측 사료들을 보더라도 그때까지 일본군이 부대 단위의 전투에서 이긴 사례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일본무사의 개인적인 용맹이 드러나는 대목만 더러 보일 뿐이다. 그런데도 東征都元帥(동정도원수) ♥都로 하여금 철수 쪽으로 결심을 굳혀 가게 했던 요인은 무엇일까.

사실, 연합군에게도 상당한 약점이 있었다. 몽골의 강요로 출전한 고려군이 士氣를 떨칠 리 없었고, 洪茶丘가 다그쳐 불과 6개월 만에 急造한 900척의 戰船들도 대체로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자기 땅에서 싸우는 일본군에 비해 연합군은 병력충원과 병참부분에서 弱勢일 수밖에 없었다. 少貳景資의 화살을 맞아 부상한 左부원수 劉復亨도 이미 戰意를 잃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 무사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용맹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의외로 강경했고, 병력도 만만치 않았다.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敵은 원래 무서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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