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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52---제2차 원정군의 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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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09 15:35 조회1,4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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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조선 2004년 2월호  

제2차 원정군의 편성
  
  1280년 쿠빌라이는 몽골의 직할령이던 耽羅(탐라: 제주도)와 中國 남해연안에 조선소를 설치, 약 3500척의 함선을 건조케 했다. 이 3500척이 완공되자 쿠빌라이는 慶元(경원: 지금의 寧波)에 回送시켰다. 이해 8월, 쿠빌라이는 그 전년에 창설했던 征日本行省(정일본행성)의 도원수에 范文虎와 都 및 洪茶丘를 임명했다. 이어 1280년 12월, 고려 忠烈王을 左丞相, ★金方慶을 도원수로 보임했다. 원래 최고사령관은 征日本行省의 우승상인 아치한(阿刺罕)이었다.
  
  원정군은 合浦로부터 출진하는 東路軍(동로군)과 양자강 하구의 慶元으로부터 출진하는 江南軍(강남군)으로 구성되었다. 東路軍은 1차 원정 때와 같이 都·洪茶丘·★金方慶에게 지휘시켰고, 江南軍은 범문호에 의해 통솔되었다. 그 병력은 麗·蒙·漢 장병으로 구성하는 東路軍이 4만 명, 패망한 南宋의 장병들로 편성된 江南軍이 10만 명. 출진의 시기는 1281년 5, 6월경으로 잡혔다. 일본에서의 兩路軍의 집결장소는 이키島 앞바다였다. 제2차 원정군의 편성과 장비는 다음과 같다.
  
  ◎東路軍
  
  ○사령관= 征日本都元帥 都
  
  ○蒙·漢軍 지휘관= 征日本都元帥 洪茶丘
    *병력 1만5000명
  
  ○高麗軍 지휘관= 征日本都元帥 ★金方慶
    *병력 1만 명
    *뱃사공·水手 1만7000명
    *東路軍 총병력 4만2000명
    *함선 900척
    *兵糧 12만3000碩(1碩은 60kg에 상당)
  
  ◎江南軍
  
  ○사령관=征日本都元帥 范文虎
  *총병력 10만 명
  *함선 3500척
  *병량 40만 碩
  
  원정군의 장비·병참물자 등에 대해서는 제1차 원정 때처럼 함선의 주력은 100t급의 千料舟(천료주). 여기에 拔都魯輕疾舟(발도로경질주: 상륙정) 및 吸水舟(흡수주: 음료수 적재선)가 뒤따르게 했다. 江南軍의 전함에는 다수의 괭이·쟁기·삽 등의 農具와 씨앗 등이 실렸다. 이것은 江南軍의 장병이 屯田軍으로 되어서 점령下의 日本땅에서 兵糧을 자체조달하기 위한 준비였다.
  
  이런 의미에서 江南軍은 병력수만 많았을 뿐이지 사실상의 이민집단이며, 제2차 원정군의 主力은 東路軍이라 할 수 있다.
  
  東路軍의 몽골·漢族 부대는 大都로부터 2개월에 걸쳐 행군, 4월 중순에 고려의 合浦에 도착, 고려군과 합류했다. 여기서 말하는 漢族은 거란족·여진족, 그리고 이들이 세운 왕조 遼와 金의 治下에 있었던 華北 일대의 胡漢混血人(호한혼혈인) 등이다. 한편 南宋의 투항병들로 구성된 江南軍도 중국 江南의 4省과 고려의 耽羅에서 건조된 戰船들이 慶元港 일대에 집결, 출항날을 기다렸다.
  
  忠烈王은 그의 희망대로 再征 직전에 征日本行省의 左丞相을 겸직하게 되었다. ★金方慶도 都·洪茶丘와 同格인 征일본도원수에 임명되었다. 忠烈王은 東路軍이 모두 合浦(합포: 마산)에 집결하자 都·洪茶丘·★金方慶이 나란히 뒤따르게 하여 全軍을 閱兵(열병)했다. 이것은 제1차 원정 때보다 고려군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려군 병사들의 士氣는 그리 높지 않았던 것 같다. 고려의 백성들은 몽골의 수탈에 의해 궁핍에 허덕였고, 특히 두 번에 걸친 전함 1800척의 건조로 골수까지 착취당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피폐로 인해 고려 軍民의 건강·영양 상태가 극도로 악화, 1279년 말에 전염병이 발생하고, 그것이 1281년부터 크게 번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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