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53---이키 懶戶浦의 合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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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09 15:37 조회1,399회 댓글0건본문
■ 월간조선 2004년 2월호
이키 懶戶浦의 合戰
東路軍이 합포를 출발한 날은 1281년 5월3일이었다. 東路軍과 江南軍이 이키島에서 합류하기로 한 것은 6월15일이었기 때문에 아직 40여 일이 남아 있던 시점이었다. 東路軍이 對馬島 앞바다에 나타난 날은 5월21일. 일부 병력이 世界村 大明浦에 상륙, 對馬島 수비대를 격멸했다.
大明浦는 지금의 佐賀村이라는 것이 通說이다. 佐賀村은 대마도 東岸의 要津으로서 예로부터 외국선의 정박지로 알려져 있다.
對馬島에 상륙하여 점령한 東路軍은 이어 이키島로 진발했다. 도중 大風을 만나 장병 130명, 梢工(초공) 36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이키의 아시베(芦邊)만에 집결한 것은 1281년 5월26일이었다.
이때 이키의 守護代는 少貳資時(쇼니 쓰케토키)였다. 쓰케토키는 鎭西奉行 츠네쓰케(少貳經資)의 아들이다. 이키의 守護代는 원래 平씨였지만, 1274년 몽골군의 내습에 의해 族滅(족멸)되어 그대로 缺員(궐원)되어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이키島를 처음부터 對馬島와 함께 放棄(방기)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제2차 원정이 임박하자 鎭西奉行 츠네쓰케는 이키를 그대로 놔둘 수도 없다고 판단, 자기 아들 쓰케토키를 守護代로 삼아 이키에 파견했던 것이다. 이때 쓰케토키의 나이 19세였다. 그가 100여 기를 거느리고 이키島에 도착한 것은 東路軍이 침공하기 수개월 전이었다.
쓰케토키는 황폐한 船匿城(선익성: 후나카쿠시)을 보수해서 새로운 방벽을 구축했다. 아시베灣에 집결한 東路軍은 船匿城에 鐵砲와 短弓을 쏘면서 상륙을 개시했다. 이키軍은 상륙하는 東路軍에게 바위를 굴리고 長弓을 쏘면서 항전하다가 玉碎(옥쇄)했다.
쓰케토키는 7년 전, 불과 12세 나이로 初陣을 경험한 용사였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孤立無援(고립무원)의 포위 속에서 온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현재, 아시베(芦邊)町의 이키神社에서는 이 젊은 무사를 祭神으로 받들고 있으며, 아시베港 뱃머리에도 그의 騎馬像이 세워져 있다. 자신의 아들 쓰케토키를 死地에 투입한 총사령관 츠네쓰케의 결단에서 가마쿠라 武士의 眞面目(진면목)이 엿보인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키軍이 전멸한 후 몽골軍은 주민들을 붙잡아 포악한 짓을 다했다. 그들은 임신부의 배를 갈라 그 안의 태아를 끄집어 내고, 부녀자들을 폭행했다. 반항하는 부녀자는 손에 구멍을 내어 묶은 다음 땅으로 끌고 다니는가 하면 뱃전에 붙들어 매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韓半島에 침입했던 倭寇도 이때의 몽골兵과 유사한 만행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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