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충렬공 金方慶 54---하카타灣의 防壘

페이지 정보

일송정 작성일04-08-09 15:39 조회1,548회 댓글0건

본문


■ 월간조선 2004년 2월호  

  하카타灣의 防壘
  
  이키島를 점령한 東路軍은 10일간 휴식하고 소부대만 잔류시킨 뒤 6월6일 하카타灣으로 침입했다. 그런데 상륙정 拔都魯輕疾舟(발도로경질주)를 타고 하카타 灣岸으로 접근하던 東路軍은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동쪽 카시이(香椎)로부터 서쪽 이마즈(今津)까지의 해안선에 연 20km에 걸쳐 防壘(방루)가 축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높이 2m 전후의 방루에는 무수한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일본병들이 빈틈없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東路軍은 즉각 작전을 변경, 防壘가 없고 수비가 엷다고 판단되던 시카노시마(志賀島)에 상륙, 그곳으로부터 「海의 中道」를 통해 내륙부로 진입하려고 했다. 시카노시마에서는 100여m에 불과한 「海의 中道」만 건너면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나온 하카타 동북쪽 半島에 상륙할 수 있었다(지금 시카노시마는 연육교로 하카타 동북부와 연결되어 있음).
  
  東路軍은 300척의 함대를 동북쪽 나가도(長門)로 파견, 간몬(關門)해협을 차단함으로써 혼슈(本州)로부터의 증원군을 저지하려고도 했다.
  
  이런 작전은 일본軍 측도 예상하고 있었다. 우선, 시카노시마에 상륙한 東路軍에 대해 오토모 요리야쓰(大友賴泰)의 부대가 공세를 걸었다. 그것을 아키다(秋田城次郞)가 이끄는 關東軍이 측면으로부터 엄호하여 東路軍을 해상으로 내몰았다. 시카노시마 쟁탈전은 6월6일 밤부터 8일간 계속되어 東路軍이 하카타灣으로부터 퇴각한 것은 6월13일이었다.
  
  당시의 전황에 대해 「高麗史節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金方慶은 6월8일 일본군과 力戰하여 참수 300여 급을 얻었지만, 洪茶丘는 일본군에 돌파되어 패주했다. 王萬戶가 이끄는 弓弩(궁노)부대의 구원에 의해 洪茶丘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다음날 6월9일에도 패전을 거듭했다. 게다가 陣中에 疫病(역병)이 나돌았기 때문에 죽은 자가 3000명에 달했다>
  
  일본 측 기록인 「八幡愚童記」에 의하면 이때의 주야에 걸친 계속 合戰으로 전사한 몽골병은 1000여 명에 달했다. 시카노시마에서 용맹을 떨친 일본軍의 무사는 이요(伊豫)의 水軍을 거느린 고노 미치아리(河野通有)였다.
  
  미치아리는 그의 祖父가 조정(天皇 편)과 幕府의 싸움에서 조정에 가담함으로써 몰락했던 家名을 어떻게 하든 만회하기로 결심, 발군의 무공을 올리겠다고 벼르던 인물이었다. 그런 미치아리가 시카노시마 海戰에 아들 미치타다(通忠), 백부인 미치토키(通時) 등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兵船 3척에 분승, 몽골군 함대로 육박했다. 몽골의 군함은 대형 構造船이었지만, 일본선은 兵船이라는 이름만 붙은 無방비의 準구조선이었다.
  
  미치아리는 곧 몽골군의 화살을 맞아 부상했고, 伯父 미치토키 등 다수의 전사자도 발생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兵船을 몽골 戰船의 舷側(현측)에 붙인 다음 돛대를 쓰러뜨려 이것을 사다리로 삼아 몽골 戰船으로 기어올라 횃불을 집어 던지고 몽골 지휘관 한 명을 잡아 퇴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부적 戰果는 예외적이며 요행수에 불과했다. 사실, 일본군의 연합군 함대 공격은 연합군이 발사한 石弓에 의해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石弓은 石彈(석탄)을 두레박式 容器에 담아 날리는 投石機(투석기)로서 그 크기가 사람 머리통만 했기 때문에 일본의 兵船들은 맞기만 하면 단 일격에 격침되었던 것이다.
  
  한편 300척의 함대를 구성, 나가도(長門)로 향했던 東路軍의 一枝軍은 다시 2隊로 나뉘어 角島(츠노시마)와 蓋井島(후다오이지마)를 점거했다. 나아가 나가도國 豊浦郡의 도이가하마와 黑井村의 야츠가하마에 상륙을 개시했던 것은 6월8일부터 9일에 걸친 양일 간이었다.
  
  이때 도이가하마의 경비를 맡고 있었던 것은 나가도의 수비군과 가마쿠라 막부 직속의 무사 正上左京亮의 부대였는데, 3500명 규모의 몽골軍에 패해 田耕村의 고센가하라까지 퇴각했다. 그러나 위급함을 들은 나가도의 守護軍은 關東으로부터 내려온 아다치 모리무네(安達盛宗) 부대 등의 증원을 얻어 6월15일 고센가하라 전투에서 몽골군을 패퇴시켰다.
  
  야츠가하마에서는 그곳 城主 아오야마(淸山玄蕃丞)가 일족을 이끌고 나가도 守護가 파견한 부대와 함께 약 2000명의 몽골 상륙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城主가 전사한 가운데 일본군은 厚母(아쓰모)까지 퇴각했다. 이 방면의 몽골군도 6월13일 厚母분지에서 패퇴하고 말았지만, 그때까지의 전반적인 전황은 결코 東路軍에게 불리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江南軍과 연합하여 전략적 요충 하카타를 再공략하기로 했던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