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55---연합군 함대의 鷹島 근해 집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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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09 15:40 조회1,608회 댓글0건본문
■ 월간조선 2004년 2월호
연합군 함대의 鷹島 근해 집결
江南軍은 사전 약정된 이키島가 아닌 平戶島에, 그것도 근 보름이나 늦게 도착했다. 江南軍은 平戶島 앞바다에 도착한 후 하카타灣岸의 방위가 견고한 것을 알고 松浦에 상륙하려고 했지만, 이곳도 松浦黨(마쓰라도우)의 격렬한 저항을 받고 물러났다.
설사, 松浦를 점령하여 大宰府로 진격하려고 하더라도 在地武士들의 맹반격이 예상되는데다 지형상의 어려움도 있어서 단념했다. 松浦와 大宰府 사이엔 표고 1000m가 넘는 세후리(脊振)·텐잔(天山) 산지가 가로놓여 있다.
鷹島를 마주보는 松浦市 星鹿町의 해안에는 지금도 「니게노우라노 石壘(元寇防壘)」가 보존되어 있다. 당시 이 防壘는 1km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300m 쯤 남아 있다. 바다 쪽의 높이는 약 2m, 육지 쪽은 약 1m, 폭 50cm.
東路軍은 이키島로부터 平戶島 앞바다로 항행, 7월 상순에야 江南軍과 합류할 수 있었다. 이런 작전상의 불협화음이 바로 연합군이 지닌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東路軍과 江南軍을 총괄한 최고사령관은 蒙將 아타하이(阿塔海)였다. 그는 도원수들을 소집해서 일본 본토 공략을 위한 작전회의를 열었다. 공략 목표는 역시 일본 鎭西軍의 본거지인 大宰府였다. 아타하이는 일본군의 반격과 전염병 창궐로 탈락자를 낸 東路軍을 재편성하고, 하카타灣의 공격부서를 정했다.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平戶島로부터 동쪽으로 逐次(축차) 이동, 이마리(伊萬里)灣 입구인 다카시마(鷹島) 근해에 집결했던 것은 7월27일(양력 8월19일)이었다. 연합군은 먼저 응도를 포위, 즉각 점령했다.
연합군의 대선단이 鷹島 앞바다에 집결, 이 섬을 점령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鎭西사령부는 즉시 하카타灣 일대의 軍船을 鷹島 근해로 출동시켰다. 그러나 일본 水軍으로서는 艦隊戰을 감행할 수 없었다. 수천 척에 달하는 연합군의 大함대가 鷹島 근해에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日本 水軍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전술은 연합군이 放心하는 틈을 타 夜襲(야습)을 감행하는 것뿐이었다.
『7월27일, 軍을 이동하여 鷹島에 이르니 곧 일본군의 軍船이 습격해 왔다. 이에 張百戶 장군은 즉각 대비, 부하들과 함께 주야로 응전했다. 일본군은 다음날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 江南軍으로 참전했던 張百戶라는 장군의 墓碑(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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