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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58---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野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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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09 15:45 조회1,7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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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조선 2004년 2월호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野望
  
  몽골황제 쿠빌라이는 1281년의 원정 실패에도 불구하고 별로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피해가 江南軍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썼지만 江南軍은 해외이민의 성격이 짙었다. 그들을 몽골에 점령된 南宋 지역에 그대로 두어 사회불안 요인의 하나가 되게 하는 것보다 해외로 배출하는 것이 통치기술상 유리했을 터이다. 좀 야박한 얘기지만, 쿠빌라이의 입장에서는 海外棄民(해외기민)인 南宋軍이 일본을 점령하면 더욱 좋고, 설사 실패하더라도 크게 밑질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南宋에 대한 戰後처리를 마무리한 쿠빌라이는 어느덧 국가위신을 걸고 세 번째 일본정벌을 중앙정부 주도로 기획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본에겐 치명적인 불행이 도래할 뻔했지만, 역사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1283년 1월 쿠빌라이는 제3차 일본원정을 위한 征東行省을 재건했다. 아타하이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출정의 시기를 8월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때 고려의 충렬왕도 左승상에 임명되었고, 軍船 150척의 建造를 맡았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징병에 반발한 江南의 중국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시 중지되었다. 쿠빌라이의 「棄民정책」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원정을 단념하지 않았던 쿠빌라이는 또다시 징병·造船 재개를 명해 고려를 경유하여 일본에 출정시킬 新附軍을 편성했다.
  
  그러던 1283년 9월과 10월에 광동·복건에 대반란이 일어났다. 쿠빌라이는 일본원정을 위해 편성했던 新附軍을 이 반란 진압을 위해 轉用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은 그 후에도 광동·광서·호남·강서로 파급되었고, 南베트남의 참파(占城)왕국 및 北베트남의 安南왕국에서도 대규모의 항전사태가 일어났다. 쿠빌라이는 1284년 2월, 일본원정군의 승상으로 임명되어 있던 아타하이를 참파 정복전에 돌렸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284년 4월, 쿠빌라이는 그동안 建造했던 兵船들을 江淮지구로 회항시켜 전투훈련을 재개했다. 이때 고려에서도 탐라에서 건조한 병선 100척을 동원하여 전투훈련에 참가했다. 제3차 원정이 실행되면 고려는 군선 650척, 병사 1만 명, 군량 10만 석을 부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불발로 그쳤다. 베트남의 참파와 交趾에서 새로운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란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뒤이어 몽골 내부에서 왕족의 반란이 터졌다. 쿠빌라이 정권 성립의 최대 지원자였던 東方 3王家가 타카차르의 손자 나얀을 우두머리로 하여 쿠빌라이에게 도전했던 것이다.
  
  쿠빌라이 정권은 위기를 맞았고, 東北亞 전역이 전쟁터가 되었다. 제3차 일본원정을 위해 대기 중이던 부대도 이 내란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5년간에 걸친 내전이 평정된 후 1년 남짓 만인 1294년 1월 쿠빌라이가 80세를 일기로 타개했다. 쿠빌라이의 죽음으로 일본원정 계획은 중지되었다.
  
  가마쿠라 武士정권은 두 번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첫 번째(1274년) 전쟁에서 기습당했던 교훈에 따른 철저한 대비태세에 의해 두 번째(1281년) 전쟁에서는 거의 대등하게 싸웠다. 大風은 최선을 다한 日本 무사들을 도운 것이지 결코 기적이 아니었다. 朝鮮왕조의 兩班정권이 壬辰倭亂으로 당한 지 40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丁卯·丙子胡亂을 당한 것과는 대비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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