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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71---만년 기록3 (고려사 김방경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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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3 11:11 조회1,4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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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김흔, 김순(金恂), 김영돈(金永旽), 김영후(金永煦), 김사형(金士衡), 박구(朴球)의 기사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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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에 또다시 글을 올리어 퇴관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추청 정난 정원(推忠靖難定遠)공신, 삼중 대광 첨의 중찬, 판전 이사사, 세자 사의 관직을 띠고 치사(致任)하게 하였다. 이어 첨의령(僉議令)을 더 주었으며 또 상락군 개국공(上洛君 開國公), 식읍(食邑) 천 호를 봉하여 실봉(實封) 3백 호를 먹게 하였다.

하루는 왕에게 요청하여 고향 땅에 성묘하러 가게 되었는데 왕은 그의 아들 김순(恂)을 태백산 제고사(祭古使)로 임명하여 아버지를 따라 고향에 가게 하였다.
김방경이 친구들의 만류로 며칠을 묵게 되었는데 아들더러 이르기를 “지금 가을 곡식이 다 익어 베어 들일 때가 되였다. 백성들의 힘이 부족하여 다른 일을 할 짬이 없는데 어찌 오래 머물러 있어 그들을 번거롭게 만들겠느냐? 너는 이 길로 곧 돌아가도록 해라!”라고 하였다.

26년에 그는 병으로 죽었는데 나이는 89세였다. 김방경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진실하고도 후하였으며 도량이 아주 넓어서 사소한 일들에 구애됨이 없었고 엄격하고도 굳세었으며 항상 말이 적었다.
아들, 조카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예의에 맞게 언동을 취하였으며 옛예식을 많이 알았으므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 있어서 조금도 차착이 없었다.
자기 몸을 잘 거두고 근면하고 절약하는 기풍을 견지하였으며 대낮에는 드러눕는 일이 없었고 늙었으되 머리칼이 검은 채로 남아 있어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능히 견디어 내었고 병환이라곤 없었다.
또 옛친구들을 잊어 버리지 않고 누가 죽었다 하면 곧 조상하러 갔으며 일평생 임금의 잘못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으며 현직에서 물러가 한가롭게 된 이후에도 나라일을 집안일 근심하듯 우려하였고 무슨 중대한 문제를 의논할 일이 있으면 왕이 반드시 김방경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가 나라의 정사에 참여한 지 오래되고 또 금부를 받아서 도원수가 되자 권력이 온 나라에 미쳤다. 그가 지휘한 전장이 전국의 주와 군에 분포되어 있게 되었으므로 부하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내상(內廂)이라고 일컬으면서 날마다 그의 문전에서 경비를 섰으며 권세에 아부하고 남의 위력을 빌어 나쁜 짓을 하는 자가 전국을 쏘다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들을 말리지 아니 하였다.
또 그가 일본을 정벌하려 갔을 때에 군공에 대한 관작과 상품의 수여에서 불공평하게 된 것이 상당히 많아서 사람들의 신망을 잃은 일이 있었으며 또 외손자 ★조문간(趙文簡)으로 하여금 ★차신(車信-제국 공주에게 총애를 받은 자)의 딸과 결혼하게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가 총애를 받으려고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죽은 뒤에 안동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당시에 정권을 잡고 있던 자들이 이것을 싫어하여 예식대로 장사 지내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왕이 이것은 잘못이었다고 후회하였다.

충선왕 때에 그를 선충 협모 정난 정국(宣忠協謀定難靖國) 공신 벽상 삼한 삼중 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의 칭호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고 하였으며 명령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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