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70---만년 기록2 (1350년 안진 발 김방경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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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3 11:10 조회1,399회 댓글0건본문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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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가을 7월에 또 왕(王)에게 전문( 文)을 올려 퇴임(退任)할 것을 청했더니 계미(癸未=1283)년 겨울 12월에 추충정난 정원공신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推忠靖難定遠功臣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해서 퇴임(退任) 치사(致仕)케 하고 을미(乙未=1285)년에 와서는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을 봉(封)하시고 식읍(食邑) 1천호에 식실봉(食實封) 삼백호(三白戶)를 받으셨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충직(忠直)하고 신의(信誼)가 돈후(敦厚)하며 기량(器量)이 크고 식견(識見)이 넓어서 사소(些少)한 일에 구애(拘碍)되지 않으며 엄(嚴)하고 굳세고 과묵(寡默)하여 비록 자질(子姪)들이라도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박식(博識)하고 규범(規範)이 있어 일을 결단(決斷)함에 백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으며 서도(書道)는 가전(家傳)한 법(法)이 있고 시(詩)에도 또한 능(能)하여 기골(奇骨)이 보통이 아니어서 추위나 더위에도 병(病)이 없고 잠이 적으며 늙으셨어도 머리가 희지 않았다.
자신(自身)을 살펴서 근검하고 낮에는 잠시도 눕지 않으셨으며 세수할 때에는 한 사발 물을 더 쓰지 아니하셨다.
벗들을 잊지 않고 상사(喪事)가 나면 바로 가서 조문(弔問)하며 의식(衣食)은 화려(華麗)함을 배척하였으며 손님이 오면 친소(親疎)의 구별(區別)없이 대접(待接)을 극진히 하고
평생(平生)에 임금의 실책(失策)은 말하지 않았으며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퇴관(退官)해 계셔도 언제나 걱정하시고 큰 잔치가 있으면 반드시 초청(招請)을 받아 가시며 큰 회의(會議)가 있으면 반드시 공(公)을 불러 의논(議論)하였고 매년(每年)정초(正初)에는 공경(公卿)과 장상(將相)들이 모두 먼저 와서 배례(拜禮)하였다.
병술(丙戌=1286)년에는 조부(祖父=김민성)께서 애육(愛育)해 주신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휴가(休暇)를 얻어 성묘(省墓)하실 때 왕(王)이 막내아들(季子) 고공정랑(考功正郞) 순(恂=문영공)을 보내서 태백산(太白山)에 제고(祭告)하니 호위(護衛)하는 공경(公卿)들이 떠나는 길에 장막(帳幕)쳤다.
아마 분영(墳瑩)에 참배(參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향당(鄕黨)의 친구들을 위해 칠 팔일을 머무는데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가을 일철이 등장(登場)하여 인력(人力)이 부족(不足)한데 어찌 내가 오래 머물러 방해가 되게 하리오!'하고 가마를 명하여 돌아왔다.
89세에 병환(病患)으로 본댁(本宅)에서 돌아가시니 임종(臨終)시까지 아품이 없이 조용히 앉아서 돌아가시니 유언(遺言)에 따라 안동(安東) 조부(祖父)산소(山所) 근처에 장사(葬事)하게 되었다.
영구(靈柩)가 떠날 때는 삼관녹사(三官錄事) 80여명이 모두 소복(素服)으로써 제사(祭祀)를 드리고 울음으로서 보내는데 그 때 공(公)을 미워하는 간신(奸臣)들 무리의 모사(某事)로 예장(禮葬)을 치르지 못하여서
왕(王)이 또한 후회(後悔)하고 충렬왕(忠烈王) 33년 정미(丁未=1307)년 6월 14일에 왕(王)이 영지(令旨)를 내려 이르되 "고 상락공 김방경(故 上洛公 金方慶)은 공(功)이 많은지라 대려(帶礪=黃河의 띠(帶)같이 작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낮아지도록 오래라는 뜻)와 같이 잊어버리기 어렵다."하고 그의 벼슬을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追贈)하고 충렬(忠烈)이라 시호(諡號)를 내리시고 왕명(王命)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충렬공(忠烈公)의 특수(特殊)한 공로(功勞)와 특이(特異)한 업적(業績)은 해와 별처럼 밝게 국사(國史)에 실려 있으니 옛 사람의 공로(功勞)와 업적(業績)이 저와 같으나 그의 자손(子孫)들에 와서 능히 계승하지 못하고 묻혀 버려서 세상에 듣기지 못한 것이 많더니
공(公)의 손자(孫子) 추성 보리동덕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복창부원군(推誠輔理同德翊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福昌府院君=김영후)의 집에 공(公)의 행장(行狀)이 비장(秘藏)되어 있으나 해가 오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써서 그 근본(根本)을 잊지 않게 했음이 대개 이와 같고 또한 자손(子孫)들에게 가히 공(公)의 남기신 기풍(氣風)과 공적(功績)이 나라와 더불어 모두 빛나서 백세(百世)을 두고 쇠(衰)하지 않을 줄 아노라.
지정 십년 경인(至正 十年 庚寅=忠烈王 2年=1350年) 2月
광정대부 검교 도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안산군 안진
(匡靖大夫 檢校 都僉議參理 禮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安山君 安震)이 끝이 적음(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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