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72---만년 기록4 (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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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3 11:12 조회1,528회 댓글0건본문
▣ 임오 8년(1282), 원 지원 19년
○ 2월에 홀치가 죽판궁(竹坂宮)에서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저물어서 왕이 남문에 나아갔는데, 중찬 ★김방경이 취하여 말을 타고 지나가니, 곧 명하여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놓아 주었다.
▣ 계미 9년(1283), 원 지원 20년
○ 12월에 중찬 ★김방경이 퇴직하기를 청하니, '추충정난 정원공신 상락공(推忠靖難定遠功臣上洛公)'의 작호를 더하여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 무자 14년(1288), 원 지원 25년
○ 전 추밀원부사 홍문계(洪文系)를 섬으로 귀양보냈다. 이때 왕과 공주가 양가의 미녀를 선발하여 원 나라의 황제에게 바치려 하였는데, 문계의 딸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문계가 권력층에 뇌물을 써서 모면해 보려 했으나 안 되므로, 총랑(摠郞) ★한사기(韓謝奇)에게 말하기를, "내가 내 딸의 머리를 깎으려고 하는데 어떤가." 하니, 사기가 이를 말리며 말하기를, "그 화(禍)가 당신에게 미칠까 두렵다." 하였으나, 문계는 듣지 않고 드디어 그 머리를 깎았다.
공주가 듣고 크게 노해서 문계를 가두어 혹형(酷刑)을 가하고 그의 가산도 몰수했다. 또 그 딸을 옥에 가두고 머리를 깎은 연유를 물으니, 그 딸이 말하기를, "내 스스로 머리를 깎은 것이요, 아버지는 실상 몰랐습니다" 하였다. 공주가 사람을 시켜 그 머리채를 끌고 쇠채찍[鐵鞭]으로 난타하여 온몸의 살갗이 온전한 곳이 없었으나 끝내 승복하지 않았다.
재상이 전문(殿門)에 나아가 청하기를, "문계는 나라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이니 조그마한 잘못으로 중한 법에 처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중찬(中贊)으로 치사한 ★김방경(金方慶)도 병든 몸으로 나가 간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끝내 귀양보냈던 것이다. 수일 후에 홍자번(洪子藩)이 극력 청하니, 명하여 가산은 돌려 주었으나 매우 미워하더니, 뒤에 몽고의 아고대(阿古大)가 오자, 곧 그의 딸을 주었다.
▣ 을미 21년(1295), 원 성종(成宗) 원정(元貞) 원년
○ 봄 정월에 홍자번(洪子藩)을 첨의령(僉議令)으로, 조인규(趙仁規)를 첨의중찬으로 삼고, 중찬으로 치사한 ★김방경(金方慶)에게 첨의령을 가자하였다.
○ ★김방경(金方慶)에게 상락군 개국공(上洛郡開國公)의 작위를 주었다.
▣ 정유 23년(1297), 원 대덕(大德) 원년
○ 5월
○ 왕이 ★김방경(金方慶)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로부터 옮긴 곳이 한 군데만이 아니었다.
▣ 무술 24년 (1298), 원 대덕 2년
○ 어느 사람이 익명서를 궁궐문에 붙이기를, "★조인규(趙仁規)의 아내가 귀신과 무당을 섬기며 저주하여, 왕으로 하여금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그 딸에게만 사랑을 쏟게 하였다" 하여, 공주가 인규와 그의 아내를 옥에 가두었는데, 이윽고 방문(榜文)을 붙인 자를 잡고 보니 바로 사재주부(司宰注簿) 윤언주(尹彦周)가 한 짓이었다. 또 인규의 아들 서(瑞)ㆍ연(璉)ㆍ후(珝)와 사위 박의(朴義)ㆍ노영수(盧穎秀) 등과 그 아내까지 가두고, 곧 철리(徹里)를 원 나라에 보내어 이를 아뢰게 하였다. 상락백(上洛伯) ★김방경(金方慶) 등이 공주에게 나아가 철리를 보내지 말도록 청했으나 듣지 않았으며, 왕이 사람을 시켜 청했는데도 듣지 않았다.
○ 사림학사(詞林學士) ★박전지(朴全之)ㆍ오한경(吳漢卿)과 시독학사 ★이진(李)과 시강학사 권영(權永)에게 붉은 가죽띠를 하사하였다. 왕은 항상 좌우를 물리치고 사림원에 행차하여 네 학사와 더불어 정치에 관한 것을 상의하며 손수 주식을 주면서 조용히 하루를 보내고, 혹 밤중까지 이르게 되면 궁 안의 촛불을 내주어 집까지 보내 주기도 하였으니, 총애함이 이에 비길 데가 없었다.
▣ 경자 26년(1300), 원 대덕 4년
○ 8월에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졸하였다. 방경은 안동(安東) 사람으로, 성품이 충성스럽고 곧으며, 미덥고 후덕하며, 엄하고 굳세며, 말이 적었고, 국량이 넓고 커서 소절에 구애되지 않았다. 전고(典故)를 많이 알아 문제를 잘 처결하였고, 근검함으로써 자신을 단속하고, 옛 친구를 잊지 않았다.
비록 치사한 뒤에 한가롭게 있으면서도 나라를 집안일처럼 걱정하였으므로, 나라에서도 큰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나이 89세에 이르도록 머리털이 세지 않았고, 기골이 보통 사람과 달라 추위와 더위에도 앓는 일이 없더니, 마침내 휙 가버렸다. 이때 권력을 잡은 자가 방경을 미워하여 끝내 예장(禮葬)을 저지하였다. 뒤에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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