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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73---만년 기록5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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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3 11:14 조회1,5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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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64권 - 지 제18 > 예 6 > 흉례 >
오복(五服)에 관한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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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忠烈王) 3년(=1276년) 정월 신묘일에 중찬 ●김방경(中贊 金方慶)이 장모의 복 중에 있었는데 편의상 후일로 미루어 하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다. 재상이 복제(服制)를 후일로 연기한 것은 예로부터 그런 예가 없었으나 그때 국가의 군무(軍務)가 복잡하였으므로 처음으로 이런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장모 : 박익정의 배위, 박휘의 어머니 (박익정-박휘-박전지)



▣《고려사》 제84권 - 지 제38 > 형법 1 > 공식 >
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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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에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어사대를 설치한 것은 주로 각 관리들의 잘못을 규탄하기 위함인데 근래에 풍속이 몹시 퇴페하여 잘못을 서로 숨기고 논죄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모든 관리들을 규탄하여 조정을 깨끗하게 하라!”
이 해 정월에 충선왕이 임금이 되어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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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공로를 평정함에 있어서 최응(崔凝), 서희(徐熙), 양규(楊規),강감찬(姜邯贊), 최사전(崔思全), ★조충(趙沖), ●김방경(金方慶) 등과 같은 사람이라야만 공신이라고 할 수 있고 그의 자손도 등용할 수 있다.
요지음 내가 매년 중국을 가게 되는데 따라 가기를 자원한 자는 모두 공신이라 하여 벼슬 등급을 높이고 상을 주며 그들의 자손도 채용하고 그들의 고향을 승격시키며 심지어는 결함 있는 사람까지 벼슬을 주고 있으니 대단히 딱한 일이다. 앞으로는 그런 자에게 벼슬을 주지 말 것이며 위반한 자는 해당 기관에서 엄격히 심의하여 파면하여야 하겠다.

☞조충은 김방경의 큰사위 조변의 조부 (조영인-조충-조계순-조변-조문간,조문근)



▣《고려사》 제76권 - 지 제30 > 백관 1 >
판문하
판문하(判門下). 건국 초기에는 내의령(內議令)이라고 부르던 것을 성종 때에 내사령(內史令)으로 고쳤고 문종 때에 와서는 중서령(中書令)으로 고치고 그 정원을 1명으로, 그 품계를 종 1품으로 정하였다.
충렬왕 원년에 폐지하였다가 21년에 도첨의령(都僉議令)을 두고 ●김방경(金方慶)을 이 관직에 임명하였다. 얼마 후 원나라의 중서령(中書令)과 유사하다 하여 판 도첨의사사사(判都僉議使司事)로 고쳤으며 그 후에 영 도첨의(領都僉議)로 고쳤다. 공민왕 5년에 다시 중서령으로, 11년에는 또 영 도첨의로, 18년에는 영 문하(領門下)로 고쳤으며 신우(辛禑) 때에 판 문하(判門下)로 고쳤다.



▣《고려사》 제89권 - 열전 제2 > 후비 2 >
계국 대장공주
충선왕(忠宣王)의 계국 대장 공주(大長公主) 보탑실련은 원나라 진왕(晉王) 감마라(甘麻刺)의 딸이다. 충렬왕 22년에 충선왕이 세자로서 원나라에 있을 때 공주에게 장가 들었다. 충렬왕 24년에 공주가 원나라로부터 고려로 왔는데 황제가 태자(太子) 아목한(阿木罕)과 승상(丞相) 옹길나대로 하여금 호송하게 하였다. 충렬왕은 금교(金郊)까지 나가 마중하였고 백관들은 교외에 나가 영접하였는데 의장(儀仗)과 기악(妓樂)을 왕을 영접할 때의 예절과 같이 하였다. 이 해에 충선이 선위(禪位)받았는데 공주의 궁을 중화궁(中和宮), 부(府)를 숭경부(崇敬府)라고 하였으며 관속을 두었다.

공주는 ★조비(趙妃)가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을 질투하여 위구르(畏吾兒) 글자로 편지를 써서 수종원들인 활활불화와 활활대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원나라로 가서 황태후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위구르(畏吾兒)란 고대의 후이구루인바 원나라는 옛날에 자기의 글자가 없었고 팔사파(八思巴)가 처음으로 몽고 글자를 창조하였으나 편지 왕래에는 위구르 글자를 많이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조비가 공주를 저주하여 왕의 사랑이 없어지게 하였다”라는 것이었다. 왕이 박경량(朴景亮)을 시켜 그 두 사람에게 편지 내용을 물어 보게 하였으나 두 사람은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를 구타하였다. 왕은 겁이 나서 충렬왕에게 알리니 충렬왕이 공주의 처소로 가서 위안하여 주고 또 몰수한 도성기(都成器), 김수, 현종주(玄宗柱), 장우(張祐) 등의 가산, 노비(人口)를 활활불화와 활활대, 장길철리(章吉徹里) 등에게 주었으며 또 김수의 처를 활활불화에게 주어 공주의 노염을 풀기에 노력하였다. 그래도 공주는 활활불화, 활활대와 대장군 김정(金精), 오정규(吳挺圭) 등을 원나라로 보내 보고하고야 말았다. 얼마 후에 어떤 자가 익명 편지를 궁문(宮門)에 붙였는데 그 글에는
“조인규(趙仁規)의 처가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저주하여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도록 하고 자기 딸만을 사랑하게 하였다”라고 씌었다. 그래서 공주가 조인규와 그의 처를 투옥하고 또 ★조인규의 아들 조서(瑞), ★조련(璉), 조후(珝)와 사위 박의(朴義), 노영수(盧潁秀) 등과 그들의 처를 가두었다.

또 철리(徹里)를 원나라에 보내 투서 사건을 알리게 하였는바 이 투서를 붙인 장본인은 사재(司宰) 주부(注簿) 윤언주(尹彦周)였다. 상락백(上洛伯) ●김방경(金方慶) 등과 여러 치사한 재상들까지 공주를 만나 보고 철리를 보내지 말라고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며 왕도 또한 사람을 보내 청하였으나 그 말도 듣지 않았다.

활활불화 등은 원나라 태후의 사신과 함께 원나로부터 돌아와서 황제의 명령으로 최충소(崔沖紹)와 장군 유온(柳溫)을 순마소(巡馬所)에 가두고 또 ★조비도 가두었다. 원나라에서 또 사신을 보내 조인규를 고문하였다. 이 사건으로 역마를 타고 오는 사람이 대략 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끝내 조인규를 원나라로 데려 갔다. 그리고 또 조인규의 처를 극히 참혹하게 고문하였으므로 그는 고통에 견디지 못해서 사실 아닌 자백을 하였으므로 원나라에서 또 사신을 보내 ★조비와 내관(宦者) 이온(李溫)을 붙잡아 갔다.



▣《고려사》 제91권 - 열전 제4 > 종실 2 >
순안공 종
순안공 왕종(王琮)은 원종 4년에 이름을 지어 주고 관례를 거행하였으며 후(侯)로 봉하였는데 그 책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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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공(公)으로 승진되었다. 왕종은 평소에 병이 많았으므로 충렬왕 3년에 그의 어머니 경창궁주가 눈 먼 중 종동(終同)을 불러 도액(度厄)하는 방법을 묻고 드디어 기도장을 차리고 기도를 한 후 그 음식을 땅에 묻었더니 내수(內竪) 양선(梁善), 대수장(大守莊) 등이 “경창 궁주가 그의 아들 왕종과 더불어 소경 중 종동을 시켜 임금을 저주하며 왕종으로 하여금 공주에게 장가들고 왕이 되도록 기도하였다”고 무고하였다.

그래서 왕이 이습, 인공수, 이지저, 인후, 장순룡, 차신 등에게 명령하여 중동을 국문하게 하고 또 중찬 ●김방경, 밀직사 ★허공, 감찰 시승(侍丞) ★조인규 등에게 명령하여 경창 궁주와 왕종을 국문하게 하였는데 복죄하지 않으니 왕이 왕종을 불러 친히 국문하였다.
재상들이 궁문 앞에 모여서 석방할 것을 청하였더니 왕은 왕종 모자의 집과 재산을 몰수하고자 하므로 찬성 유경(柳璥)이 말하기를 -----

☞허공은 김순의 장인
☞조인규는 충렬공 둘째아들 김흔 장군의 둘째사위 조련의 부 (조인규-조련-?-조준)



▣《고려사》 제103권 - 열전 제16 >
조충
〔조변의 기사 첨부〕
조충의 자는 담약(湛若)이니 시중(侍中) 조영인(永仁)의 아들이었다. 생후 한 달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점차 자라면서 어머니를 지극히 사모하고 슬퍼하였으므로 집안 사람이 그를 효동(孝童)이라고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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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조숙창(趙叔昌)과 ★조계순(趙季恂) 인데 조숙창은 따로 전기가 있다. 조계순은 벼슬이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광정(光定)이라 하였다. 조계순의 아들은 ★조변이니 그는 조상의 문음과 장인 ●김방경(金方慶)의 관계로 단번에 낭장(郎將)으로 뛰어올라 감찰사(監察史)를 겸임하고 있었다.
한 번은 행수(行首)로 궁중에 숙직하게 되어 날이 저물어서 들어가니 문이 이미 닫혔다. 원종(元宗)이 이 소식을 듣고 문틈으로 들어오게 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조변이 사양하기를 “신하된 자는 문틈으로 드나들 수 없다”하고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유사(有司)들이 수직에 결근하였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파직당하였으나 사람들은 그가 정직한 것을 칭찬하였다.
●김방경이 진도(珍島)를 토벌할 때에 왕에게 고하고 조변을 다시 불러 장군으로 삼았다. 또 ●김방경을 따라 일본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웠으며 후에 원나라가 재차 일본을 원정할 때에 충렬왕(忠烈王)이 원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소신 교위(昭信校尉), 관군총파 벼슬을 주었으며 은패(銀牌)와 은인(銀印)을 주었다. 그리고 ●김방경을 따라 원정의 길을 떠났다.
벼슬이 우부승지(右副承旨),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역임하고 병으로 사면하니 왕이 그의 사위 유서(庾瑞)를 낭장(郎將)으로 등용하여 그를 위로하여 주었다. 그는 그 후 미구에 죽었다. ★조변은 용모가 장대하고 고왔으며 옛문헌과 제도에 대하여도 자못 통하였고 성품이 너그러워서 아무에게도 원한을 끼친 일이 없었다. 아들은 조문간(文簡) 조문근(文瑾)이다.
★조문간의 자는 경지(敬之)이니 벼슬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그도 역시 풍채가 아름답고 예절에 익숙하여 당시의 칭찬을 받았다.
조문근은 벼슬이 참지 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에까지 이르렀다.

☞조변은 충렬공의 큰 사위 (조영인-조충-조계순-조변-조문간,조문근)



▣《고려사》 제106권 - 열전 제19 >
이주
〔이행검(李行儉)의 기사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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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오래 근무하다가 지홍주사(知洪州事)로 파견되어 갔는데 삼별초의 반란 때에 적들에게 붙잡혔다. 적들이 그에게 관리의 선발, 임명 사업을 맡게 하였는데 ●김방경이 반적들을 격파하자 ★이행검이 그의 아버지 ●김효인(金孝印)의 문생(文生)이 된다 하여 이행검을 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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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31권 - 세가 제31 > 충렬왕 4 >
충렬왕 경자 26년(1300)
정축일에 왕이 황제의 연회에 참석하였더니 황제는 이날이 황태자의 생일인 까닭에 인후, ★김흔 등을 용서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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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무오일에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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